책 | 장 콕토, 『앙팡 떼리블(창비세계문학 48)』
'앙팡'이라는 단어는 영어로 kids 정도로 해석될텐데 불어와 영어 둘 다 한국어의 '아이들'이라는 어감과는 사뭇 다르게 다가온다. 한국어 '아이'의 페이소스가 순수함, 동심에 가깝다면 'kid'는 혼란스럽고 어찌할 바를 모르는 채로, 문자 그대로 의식의 흐름대로 살아가는 어설프게 웃자란 10대가 떠오른다.
영화 <조찬 클럽>과 <멍하고 혼돈스러운>에 나오는 고등학생들의 모습은 <앙팡 떼리블> 속 뽈, 엘리자베뜨, 제라르의 모습 그리고 관계와 겹쳐 보이는 부분들이 있다. 일견 이상해 보이고 한편으론 쿨해 보이기도 하는 그 모습은 아이와 어른 사이에 낀 나잇대 특유의 갈피를 잡지 못하는 의식 세계를 나타내는 것 같다.
나의 사춘기는 대학생이 되고 나서야 찾아왔다. 명륜동에 있는 캠퍼스에서 만난 친구들도 나와 성장 배경이나 나잇대가 다 거기서 거기였기 때문에,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모양새의 사춘기를 함께 맞이하고 있었다. 우리는 트뤼포의 영화에 대해 떠들어댔고 굳이 중요하지도 않은 사회과학 레포트 작성에 참고하겠다고 '풀무질'이라는 서점에 우르르 몰려가 장 폴 사르트르와 롤랑 바르트의 책을 사서 옆구리에 끼고 다녔다. 반도 안 읽은 책들은 지금도 고이 부모님 집의 책장에 꽂혀있다. 사춘기의 사춘기 단계까지 나아가 더 이상 멋있어 보이는 것에도 관심이 없어지고 아예 과격해지고 반항만 하고 싶은 인간이 되어 나는 <공산당 선언>이나 <역사의 종언> 같은 책에 밑줄을 그어가며 나 스스로 그 내용을 이해했다고 믿으며, 노래패 선배들을 따라 가두 시위에 나가곤 했다. 이 때의 나는 무섭도록 진실되고 동시에 끝없이 우울했던 기억이 난다. 기쁨과 슬픔의 감정, 사람들과의 관계, 그리고 내 입에 들어가는 밥 한숟가락까지 너무 무겁고 예리하게 느껴지던 시절이었다.
나이를 먹고 이론으로서가 아닌 실천(강제적)으로서의 무산계급에 진입하하게 되자 우울감은 슬그머니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고 그제서야 나는 멜랑콜리와 비참함의 차이를 깨달았다. 멜랑콜리는 감정적 유희의 범주였단 것을... 하지만 감정의 유희라고해서 진실됨이 부족한 건 아니란 점은, 그보다 더 성장하고 나서야 깨달았지만 말이다.
그것이 어떤 느낌이었는지 생생하게 기억하는 동시에 이 과정에서 빠져나와 외부에서 바라보는 시선도 알기에, 나는 <조찬 클럽>의 마지막 장면에서 저드 넬슨이 운동장을 걸어가며 허공에 주먹을 지켜드는 장면과 넷플릭스 <기묘한 이야기>에서 맥스가 'Running up that hill'이 흐르는 동안 빛을 향해 달려가는 장면을 좋아한다. 자신도 자신을 이해하기 어렵지만 그 아리송함을 해결할 생각조차 하지 않고 서로를 향해 온 몸을 부딪치는 과격함은 사춘기의 특권이다. 아리송한 의식의 세계를 유영하며 때로는 어둠 속에 좌절하고 때로는 환희의 빛을 좇아 있는 힘껏 달리기도 한다. 책 후반의 해설을 보니 프랑스어 형용사 'terrible'은 무서운, 지독한, 같은 뜻과 동시에 대단한, 놀라운 같은 의미까지 함께 지닌다고 한다. 단어 그 자체로 젊음의 시적poetic 표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