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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책 이야기

문제는 페티시가 아니라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롤리타>

by Good night and

넷플릭스에서 <모럴 센스>라는 영화를 봤다. 소녀시대 막내 서현이 BDSM을 소재로 한 영화에 나온다니, 격세지감과 호기심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영화는 이상성욕과 페티시의 경계는 상대방을 인격적으로 인지하고 존중하느냐 아니냐다, 라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한국 영화답게 BDSM 자체를 건전(?)하게 묘사했고 요즘 영화답게 사회적 소수자를 불편하게 만들만한 비유나 단어는 모두 배제했기에, 영화 속에서 비주얼적이나 내용적으로 충격을 받을만한 부분은 없었다. 나 자신도 딱히 사회적 터부나 유별난 페티시에 관심이 많은 편은 아니어서 그냥 영화에서 설명하는 페티시들의 정의에 대해 그런가 보다, 하고 기계적으로 이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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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보코프의 <롤리타>는 읽는 이들이 거의 이견의 여지 없이 같은 그림을 상상할 수 있을 정도로 길고 자세한 묘사를 이어 나간다. 구체적인 설명과 험버트의 정신병증적인 비유를 곁들여, '심상'이라기보다는 외려 그림, 사진에 가까운 이미지를 떠오르게 한다. 그래서 중년의 백인 남성이, 그 나이 특유의 어떤 어색함 혹은 빗나감이 느껴지는 꾸밈새를 가진 청소년과 자동차 여행을 다니는 모습을 영상처럼 머릿속에 계속 재생하게 된다. 험버트가 묘사하는 돌로레스와의 상호 작용 상황들을, 이렇게 머릿속에 먼저 떠올리고 나면 거기에 대한 나의 가치 판단이나 감상이 뒤따라 붙는데, 피곤에 쩔은 아저씨가 반항기 청소년에게 성적 매력을 느껴서 어떻게하든 '한번 해 보려고' 쩔쩔매는 모습, 돌연 자기가 가진 어른이란 권위와 그나마 나은 경제력을 이용해 아이를 통제하려고 하는 모습 등이 굉장히 우스워 보였다.


소설에는 테니스를 치는 돌로레스의 외형에 대한 긴 묘사가 나오는 부분이 있다. 성장기에 있는 청소년의 신체 특성이 머릿속에 그려지고, 환한 햇살 속에서 아저씨들과 어울려 테니스를 치는 돌로레스의 모습이 상상된다.


이 장면을 읽으며 내가 떠올렸던 또 다른 사람은 세레나 윌리엄스다. 세레나 윌리엄스가 테니스 치는 모습을 떠올려 보면, 소설 속 돌로레스의 모습과는 모든 것이 전부 정반대라고 할 수 있다. 이건 유튜브를 꽤 많이 보다가 알게 된 것인데 세레나 윌리엄스 같은 외모의 흑인 인종 여성들에게 성적 매력을 느끼는 동양인 남자들도 많다(건전한 국제 결혼 스토리 영상을 보다 보면 관련 추천이 엄청 많이 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기보다 키가 크거나 몸집이 큰 여자들을 희화화 하는 남자들의 유머가 안 웃긴 것은 실제로 다양한 성적 취향을 가진 사람들을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2019123016533571633_1577692415.jpg 1962년 작 영화 <롤리타>
M0020081_03[S750,750].jpg 1997년 작 영화 <롤리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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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의 첫 문구는 굉장이 유명하다. "롤리타, 내 삶의 빛, 내 몸의 불이여, 나의 죄, 나의 영혼이여. 롤-리-타." 이번에 트레바리에서 이 책을 난생 처음 제대로 읽어봤는데, 지금보다 좀 더 문명이 촘촘하지 않았던 시절 인터넷 여기저기에서 감성 문구로 이 소설의 첫 문구가 쓰이는 걸 진짜 자주 봤다. 지금 보니 이 문구는 책 전반에 걸쳐 꾸준히 등장하는 발음에 기반한 언어 유희의 대표적 문장이다. 당시 싸이월드(그렇다, 나는 싸이월드를 실제로 많이 썼었다..) 클럽 중 대한민국의 감성쟁이는 다 모였다 하는 유명 클럽 '비트윈더바'에는 각종 영화 캡쳐 이미지가 자주 올라오곤 했는데(그 때는 영화 파일 출처도 다 그러려니 했고 클립이나 스크린샷 추출도 다 그러려니 하던 시절이었다. 말했듯이 문명의 그물이 지금보다 성겼던 시절이다...) 제레미 아이언스가 주연한 영화 <롤리타>는 인기 단골 레퍼토리 중 하나였다. 돌로레스를 연기한 도미니크 스웨인이 크롭티를 입고 빨간 립스틱을 바른 사진을 일주일에 한번씩은 주기적으로 목격했던 것 같다. 이렇게 지겹도록 접했는데도 중년 남자가 미성년자를 사랑하는 내용이라고 해서 그닥 궁금증도 생기질 않아 한번도 영화나 책을 읽어봐야겠단 생각을 해 보지 않았었다.


굳이 도덕적 경계심에서 그런 것은 아니다. '젊고 아름다운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는 것이 훨씬 흥미롭지 않아?'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배우든 배역이든 한 쪽이 너무 늙었거나 너무 어린 로맨스 관계에서는 성적 긴장감이 별로 안 느껴지는데 이건 바로 위에 말한 이유 때문이다. 나이나 어떤 편차가 너무 큰 연인들 간에는 너무나도 분명하게 위계 권력이 생긴다. 이 권력의 낙차에 대해 메타인지가 없는 당사자 두 사람이, 자기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감정의 소용돌이와 헤프닝들이 전부 순수하게 사랑 때문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모습은, 뭐랄까, 비웃음을 자아낸다. 너무 냉소적인 표현이라 당사자들에겐 미안하지만 나는 원래 냉소적인 사람이라서 어쩔 수 없다.


권력의 낙차는 사회적 장벽과는 분명하게 다른 것이다. 한국 남자와 한국 여자의 로맨스에는 사회적 장벽이 없지만 권력의 낙차는 있다. 한국 남자와 미국 남자의 로맨틱한 관계에는 사회적 장벽이 있다. 할아버지와 아가씨의 결혼에는 사회적 장벽은 상대적으로 적고 권력의 낙차는 크다, 할머니와 총각의 결혼에는 권력의 낙차는 잘 모르겠고(아직 할머니로서의 당사자성을 몰라서..) 사회적 장벽이 크다. 그래서 부모도, 재산도 없는 돌로레스를 마음대로 가스라이팅할 수 있는 위치에서 사랑을 구걸하는 연인처럼 자신을 묘사하는 험버트의 자아 인식은 정신병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화대를 주듯이 돈을 주어 돌로레스를 성관계에 길들이고, 성적 매력에 있어서는 또렷한 상황 판단이 가능한 서큐버스처럼 묘사하다가 자신에게 반기를 들 때에는 천지분간 못하는 어린애처럼 훈육하려 하는 모습은, 본문 속 돌로레스의 표현을 빌자면 "지랄을 하세요."였다.


검열을 곁들인 문명의 촘촘한 그물망을 피해갈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어진 이 시대에 이 고전은 감성 글귀, 감성 이미지로서의 장식적 자격을 박탈 당했다. 이제는 옛날처럼 책을 다 안 읽고 아무 글귀나 발췌해서 올렸다가는, 금기를 넘나드는 에로티시즘이라고만 보기엔 이 소설이 결국 그루밍 성범죄로 끝나는 내러티브란 점을 누가 바로 댓글로 지적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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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나는 '소아성애'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취향의 영역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며 어디서도 표현하거나 말하지 않고 자신의 머릿속으로 생각할 때만 '소아성애'라는 페티시의 영역으로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어린아이의 모양새를 한 오브젝트나 실재하는 어린 아이를 보고 성욕을 느끼는 것 그리고 그것을 언어든 행동이든 표현하는 것은 미성년자 의제 강간이 일어나는 첫 단계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소아성애'는 마치 슈뢰딩거의 고양이 실험처럼 직접 관찰이 되는 순간 '미성년자 의제강간'이 되는 입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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