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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의 시간

책 | 버지니아 울프, 『등대로(열린책들 세계문학 212)

by Good night and

아직 버지니아 울프의 책을 한 번도 읽어보지 않았을 때, <디 아워스>라는 영화로 나는 버지니아 울프의 세계를 먼저 접했다. <디 아워스>에는 <댈러웨이 부인>을 집필 중인 버지니아 울프, <댈러웨이 부인>을 읽고 있는 로라, 댈러웨이 부인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클라리사, 세 명의 여자가 등장하고 완전히 다른 시대에서 각각의 시간을 사는 모습을 보여준다. 세 사람이 각자의 인생을 사는 모습과 어떤 선택들을 하는 모습이 계속해서 묘사 된다. 필립 글래스의 음악을 들으며 뭔가가 일어날 것 같은 마음에 불안해 하며 계속 그녀들을 지켜 보다가, '이거 도대체 무슨 내용인거야' 라는 생각이 들 때쯤, 영화는 거의 끝나고, 끝에 가서야 앞의 그 약100분 가량의 묘사가 무엇을 의미했는지 한 번에 밝힌다.


<등대로> 의 1부를 읽다가 나는 갑자기 가슴이 갑갑하게 옥죄어 오는 것을 느꼈는데, 그건 모든 사람의 심리와 행동이 하나하나 전부 묘사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디 아워스> 내내 고막을 울리던 필립 글래스의 음악이 무한히 반복 되는 느낌이었다. 누군지 모르는 타인의 면면을 지켜 보는 것만큼 재미 없는 일이 세상에 또 있을까. 버지니아 울프는 실제로 자신의 부모님을 소재로 하여 램지와 램지 부인의 묘사를 그렸다고 하는데 그래서 그런지 정말 실존하는 사람들을 눈 앞에서 관찰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왜 서양 중년 부부의 일상 묘사가 규칙적이게 불안정한 필립 글래스의 선율처럼 느껴졌을까. 왜 어떤 격정도, 기승전결도 없는 그 묘사가, 오묘하게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을까.


제 아무리 긴 설명을 끝도 없이 듣는다 한들 그걸로 타인의 내면을 이해할 수 있을까?


같은 생활 양식과 반경을 공유하고 있고 하나의 그물망 속 관계에 묶여있는 인간들이었지만 각자의 묘사가 전개될 수록 나는 이 관계들에서, 한겨울 보일러를 빵빵하게 튼 방 안에서 젖은 수건 하나 안 널고 억지로 잠이 들어야 할 때처럼, 콧속이 바짝 말라가는 건조한 답답함을 느꼈다. 그 지리한 묘사에서 나는 끊임 없이 타인과 교류하고 있지만 동시에 자신의 세계 안에서 한 발짝도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인간 종의 태생적 고독을 느꼈다. 갑자기 그 건조한 고립에 찬물을 확 끼얹은 것처럼, 갑자기 축축하게 팍 젖어버리는 느낌이 들었을 때는, 릴리가 램지 부인의 이름을 소리쳐 불렀을 때였다. 자신의 외로움을 처절하게 느껴질 만큼 큰 소리를 질러 표현하는 사람만이 결국 가장 타인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다른 사람들이 행복을 찾고 서로 가까워지길 바라던 램지 부인의 강박에 가까운 선의도, 자신의 건조한 외로움에 계속해서 물을 뿌리는 행위였던 것 같다.


동해 바다에 다녀왔다. 멀리서 수평선을 바라 보면 '어떻게 저렇게 평평하고 길다란 일직선이 있을 수 있지'란 생각이 든다. 내 양 옆 시야 밖으로 뻗쳐져 나간 그 푸른 직선을 멍하니 보고 있으면 문득 막막한 기분이 드는데, 바다 가까이 다가가니 바람이 장난 아니게 불어서 거세게 파도가 일고 있었다. 사람들이 가까이 있는 자그마한 돌섬에 올라가 사진을 찍고 있었다. 친구들과 돌다리를 건너 그 섬으로 가다가 갑자기 거대한 파도가 몰아쳐 바깥 쪽을 걷던 나 혼자 물벼락을 맞았다. 자칫 하다가 파도에 쓸려가 죽는 것도 한 순간이겠다 싶었다. 그렇게 고요하고 막막한 수평선이 정작 가까이 가면 사람의 목숨을 앗아갈 정도로 요란하고 강력한 파도를 품고 있다니, 이 세상은 정말 모를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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