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홍콩-센트럴

by Good night and

여름에 홍콩을 가겠다는 무모한 결정은 친구들이 있어서 급작스럽게 이뤄졌다. 그리고 홍콩행의 가장 큰 목적이, 정크 파티이기 때문에 홍콩의 잔혹한 습도와 무더위를 견딜 수 있을거란 생각이 들었다. 시작은 혜진의 은밀한 제안이었다. 6월에 홍콩 여행을 갈거라며 혜진이 내게 툭 던진 한마디. "정크 파티 같이 가볼래요 수지님?" 보트를 빌려서, 바다 위에서 샴페인과 맥주를 마시며 수영을 하는 파티란다. 홍콩을 그렇게 자주 가봤어도 거기서 배를 타본 적은 없었다. 20대 때 록히드 마틴에서 근무했던 우리 엄마는 홍콩 출장을 가서 애버딘에서 요트를 타본 적이 있다고 했다. 혜진이가 제안한 정크 파티는 그런 럭셔리한 프라이빗 요트는 아니지만, 20명 가량의 사람들이 모여서 비용을 각출하면 인당 15만원 정도의 비용으로 보트 하나를 전세낼 수 있다는 거였다. 이거 서양 부자들이 지중해나 바베이도스 같은데서 하는 그 보트 파티 아닌가? 그걸 15만원에 체험해 볼 수 있다니, 그 말에 낚인 나는, 술과 파티가 있는 곳이라면 지구 반대편이라도 헤엄쳐 갈 민주를 끌어들였다. 한 명이라도 머릿수를 늘려야 보트 대여 비용이 저렴해질 터였다. 그렇게 며칠만에 원정대가 꾸려졌다.


출발 전, 혜진은 '언니들 모시고 가려니 긴장된다'며 정성스럽게 만든 엑셀 계획표를 공유해 왔다. 나름 가이드 역할을 자처하는 귀여운 모습에 살짝 감동하려던 찰나, 파일을 열어본 나는 눈을 의심했다. 첫째날 3시 가량 홍콩 공항에 도착하는 데, 오후 4시 이후부터 자정까지 이어지는 칸에는 *[Bar 1], [Bar 2], [Bar 3]**가 3시간 단위로 빽빽하게 박혀 있었다. 일정표 자체도 하루치 밖에 없었는데 어차피 둘째날은 하루종일 정크 파티고 셋째날은 각자 알아서 집에 갈거니까 필요 없지 않느냔 반문이 돌아왔다. 그럼 이 바1,2,3은 왜 써있냐 했더니 아직 어디 갈지 100% 정하진 못해서 가게 이름을 못 썼단다. 혜진은 대체 무엇을 위해 셀 서식을 맞추고 글자 크기를 조절하는 정성을 들인 걸까.


인천공항에서, 어느 지상파 채널의 일요일 저녁 예능 오프닝 같은 이 여행의 진짜 시작이 일어났다. 민주와 체크인 카운트에서 만나 수속을 마치고, 이미 게이트 앞에서 기다린다는 혜진을 향해 갔다. 그런데 약속 장소에 나타난 건 혜진뿐만이 아니었다. "어...? 서영님?"

우리 넷은 같은 회사를 다니는 또래 친구들이고, 이 회사는 서로를 이름+님 으로 부르는 문화가 정착돼 있었다. 그리고 서영은 혜진과 원래 절친이지만 나와 민주와는 막연한 친근감 정도만 있는 동료였는데, 그녀가 여기에 나타날지, 여행 파티의 일원이었는지 우리는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이게 정말 공중파 주말 저녁 예능이었다면, 화면 하단에는 분명 '[충격] 게이트 뒤에서 나타난 의문의 여인?!' 같은 자막과 함께, 나와 민주가 '어머나' 포즈를 취하는 슬로우모션 화면이 5번 정도 다른 각도에서 리플레이 됐을 것이다. 알고 보니 애초에 홍콩 여행을 가려던건 서영이었고, 정크 파티를 하며 놀고 싶었던 혜진이 마침 잘됐다며 그녀를 따라가 둘이 숙소를 쉐어하기로 했고, 나중에 나와 민주를 초대한거였다. 웃긴 건, 아무도 당황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서영이 회사 사람들 사이에서도 자주 '파티'를 주도하는 캐릭터라는걸 알고 있었고(한국인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진짜 파티) 민주는 놀 때는 옆에 누가 있든 정말로 아무 상관도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비행기 탑승이 시작됐고 혜진의 계획표 속 [Bar 1]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구룡반도와 홍콩섬 사이의 항구에 서서, 서로 건너편의 빌딩숲을 바라볼 때면 이 도시의 바다와 건물들은 묘한 마법을 부린다. 우리는 가장 먼저 랜드마크 쇼핑몰 건물에 있는 루프탑 바로 향했다. 아직 네다섯시 경으로 해가 지지 않았지만, 빌딩 숲 사이로 환한 햇살을 받은 푸른 바다 위에는 하얀 요트들이 그림처럼 떠다녔고, 혜진이 예약한 테이블 위에 색색의 칵테일이 놓이자 그 마법은 더 극대화 되었다. 야경이 조금도 부럽지 않은 풍경이었다. 한껏 드레스업 하고 모인 우리는 마치 <셀링 선셋>에 나오는 사람들이 된 것 같은 기분으로 잔을 부딪혔다. 혜진은 경치가 좋은 곳에서 인생샷을 건져야 한다며 이리저리 포토스팟을 찾더니, 우리 한 명씩 전부 독사진을 남길 때까지 그 바를 떠나지 못하게 했다.

그 다음으로는 바로 앞에 있는 럭셔리하게 재해석된 사천 음식이 나오는 식당에서 저녁 식사와 함께 맥주를 기울였다. 이 때까지만 해도 갓 화장한 네 명의 얼굴이 아직 다 뽀송했고, 내 발에는 몇년 전 면세점에서 산 샤넬 뮬이 신겨져 있었다. 하지만 식사가 끝나갈 무렵부터 혜진의 채찍질(타임키핑)이 시작됐다.


우리의 이동은 유흥이 아니라 작전에 가까웠다. 혜진은 오늘 숙소로 돌아가기 전에 적어도 바와 클럽 4개는 들러야 한다는 자신이 세운 룰을, 무슨 헌법처럼 지키려고 했다. 센트럴 루프탑에서의 우아함은 이미 란콰이퐁의 가파르고 좁은 경사로를 가득 메운 인파 속에 사라졌다. 나는 가방 안에 챙겨온 플립플랍으로 신발을 갈아 신었고, 우리는 말도 안되는 가격의 패키지를 외치는 호객꾼들을 헤치고 진짜 해피아워를 제공하는 가게를 물색했다. 혜진은 인파를 헤치며 나아가는 와중에도 뒤를 돌아보며 인원체크를 잊지 않았다. 그 모습은 흡사 수학여행 온 고등학생들을 통제하는 교관 같기도 했고, 1분 1초가 아까운 패키지여행 가이드 같기도 했다. 첫번째 바에서 야외 좌석에 앉아 차가운 맥주를 생수처럼 마시고, '엠지샷'(지금은 유행도 지나버린 정수리 보이는 각도에서 찍는 단체 셀카)을 찍겠다며 30분을 떠들다가, 다음 가게를 향해 또 다시 엉덩이를 들어 걸음을 재촉했다. 사실 여기는 예약한 칵테일바 시간 전 '음주 전 음주'를 위해 들른 곳이었기 때문이다..


혜진이 "사진 잘 나오는 곳"이라며 야심 차게 우리를 몰아넣은 [Bar2]는 인테리어부터가 압도적이었다. (이 파트를 쓰면서 제미나이에 '란콰이퐁' '사진이 잘 나오는 칵테일 바'라는 구절을 입력했을 뿐인데, 그 장소를 찾아내라고 한 적도 없고 가게 이름을 지금까지 알지도 못했는데, 바로 "<아이언 페어리즈>였던 것 같다"라며 정답을 말해버려서 소름이 돋았다, 는 여담)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금요일밤 소호의 인파와 살인적 더위에 찌들어가던 서영과 민주의 눈빛이 변했다. 화려한 조명과 감각적인 인테리어를 보자마자 언제 힘들었냐는 듯 가방에서 쿠션을 꺼내 얼굴에 바르고는 자신들을 촬영해 줄것을 요구했다. 혜진은 마치 기다리고 있었으니 제대로 모시겠다는 듯, 또 사진을 찍어주기 시작했다. 보통 나는 사진을 잘 안 찍기 때문에(특히 내 모습) 이런 시간에는 혼자 SNS를 보거나, 오브젝트나 인테리어 사진을 이리저리 찍어보며 따로 시간을 보내는데, 이 여행에선 그럴 틈도 없었다. 나도 무조건 사진을 찍어야했고(혜진의 촬영 고집은 우리 엄마보다 더욱 강경했다) 스피드가 워낙 빨라서 딴 생각을 할 틈도 없이 또 금방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다.


우리가 향한 곳은 바로 옆의 PMQ중정(PMQ courtyard). 중정에는 거대한 LED 조명의 설치 미술과 미로처럼 설계된 작업물들이 있었다. 이제는 환청처럼 아스라히 들리는 혜진의 목소리가 귀 옆에서 또 다시 울렸다. "저기 가서 서보세요!"

오랜만에 온 PMQ.. 밤에 오니 또 새롭고 지난 번에는 여기 중정에서 마드모아젤 샤넬 전시가 있었는데.. 같은 내 마음 속 감상은 더 이어질 새도 없었다. 그 설치물은 감상을 위한 게 아니었고, 나는 아직도 그 전시가 뭐였는지 모른다. 몇 십장의 사진을 갤러리에 저장하고 PMQ 건물 1층에서 한 사람씩 화장실을 해결하고 나오자 혜진이 또 다시 지시사항을 내렸다. 이제 11시 가까이 되었으니 클럽을 가야 한다는 것이다. 평소 한국에서도 조금 취기가 오르거나 자정만 되면 "이태원 가자"를 외치던 혜진의 버릇이 어디서 온 것인지, 나는 그 순간 깨달았다. 가파른 언덕, 좁은 골목 사이로 쏟아져 나오는 전 세계 인종, 그리고 가게마다 터져 나오는 베이스음까지. 이 녀석은 자기 마음의 고향과도 같은 란콰이퐁을 늘 그리워 하고 있던 것이었다...


우리는 어느 클럽에 들어갈지 탐색하며 헐리우드 로드의 화려한 로비들을 지나쳤다. 어느 빌딩 입구에서 터번을 두르고 몸에 딱 붙는 양복을 입은, 키가 족히 190cm는 되어 보이는 남자가 민주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모습을 보자 나는 생각했다. '그래, 이게 홍콩이지.' 서로 다른 인종과 문화가 뒤섞여 무례할 정도로 노골적인 시선을 주고받는 이 모습, 우리가 쨍한 태양 아래 루프탑에서 본 마천루와 요트가 홍콩의 포장지였다면, 지금 이 길거리야말로 홍콩의 본체였다. 민중을 이끄는 혁명 기수처럼 우리를 리드하던 혜진이 점찍은 클럽 앞에 서자, 가드가 내 발끝을 가리켰다. 플립플랍 차림은 입장이 안 된다는 단호한 거절. 보통의 여행자라면 당황했겠지만, 나는 주저 없이 가방을 열어 아까 벗어서 집어넣은 샤넬 뮬을 꺼냈다. 신발을 갈아신고 '짠'하는 포즈를 취하자 가드는 말없이 길을 터줬다. 샤넬을 신고 신분증 검사를 하는 클럽에 들어서는 일련의 과정이 또 한번의 성인식 같아 기분이 우쭐해졌다.

클럽 안은 자욱한 연기와 비트, 그리고 국적을 알 수 없는 사람들의 열기로 가득했다. 우리는 그 낯선 소음 속에 완벽하게 녹아들어 있었다. 우리는 처음 보는 외국인 애들과 큐대를 잡고 당구 공을 굴리며 이 때부터 누가 계산했는지 정확히 기억도 안나는 잔들을 계속 주문했다. 새끼 발가락이 터질것처럼 아파오고 기력이 떨어져 누가 포켓볼을 하자거나 말을 걸어와도 팔만 휘휘 내저을 수밖에 없었다. '이젠 제발 가서 좀 자자'라고 혜진을 설득해 가게를 나왔다. 아무리 밤이 깊어도 낮과 똑같이 더웠다. 자정을 넘기 전보다 길거리에 사람은 더 많아진 것 같았다.

숙소에 돌아와 씻고 누우니 새벽 2시쯤 됐던 것 같다. 아니 한 3시쯤이었나...? 하지만 우리는 다음날 오전 한 8시쯤에 또 홍콩역으로 가야했다... 보트를 타기 전 팀호완에서 아침을 먹어야 했기 때문이다(혜진의 명령). 민주와 나는 지금 바로 자도 5시간 잔다고 서로 중얼거리며 아스라히 잠에 빠졌다. 하얏트 센트릭의 객실 통창 너머로 밤의 빅토리아 하버가 펼쳐져 있었고, 모든 건물의 불이 꺼진 구룡반도 앞 어둠에 잠긴 바다는 묵직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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