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Good night and Jun 29. 2020

무서운 이야기

아리 애스터 <유전>

스포일러 포함


과학적으로 얼만큼 근거가 있을진 모르지만 아무래도 꿈에서는 평소에는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 할 일이 없는 내 무의식 속 기제들이 많이 표현되는 것 같다. 내가 살면서 꾸었던, 가끔 꾸는, 가장 끔찍한 악몽은 시체를 숨기는 꿈이다. 내가 죽인 시체인지 다른 사람이 죽인 시체인지는 알 수 없다. 죄를 저지르는 것 자체가 공포라면 아마 살인을 저지르는 꿈을 꿨을 것 같고, 죄인의 신분이 되는 것이 두려운 거라면 감옥에 있는 꿈을 꿀 것 같은데, 항상 내 악몽은 시체를 숨길 곳을 찾아 헤매는 내용이다. 다른 사람들도 그러 하듯 대부분의 꿈은 잠에서 깨어나 햇빛 아래를 걷다 보면 으레 잊어버리곤 하는데 이런 류의 악몽은 꿀 때마다 매번 생생히 그 느낌이 며칠 씩 기억된다. 누군지도 모르고 누가 죽였는지도 모르는 시체를 침대 밑이나 집 안 어딘가에 감추려고 애쓰며, 다른 사람들 앞에서 태연한 척 하려고 애쓰며 미친 듯이 식은땀을 흘리는 그 기분.


어쩌면 단순히 죄책감만이 아니라, 내가 컨트롤 할 수 없는 문제에 대한 두려움도 포함 돼 있을 수도 있다. 종합해서 말하자면 내가 의도하지 않게 잘못을 저지르는 것을 제일 두려워 하는 게 아닐까. 이렇게 태연하게 적기에는 좀 껄끄러운 문장이지만 아마 꿈 속에서 내가 작정하고 처음부터 계획하여 살인을 저질러 생긴 시체였다면 그렇게 당황스러워하며 그 시체를 숨기려고 하지 않았을 것 같다. 아마 시체를 숨길 방법을 미리 계획해 두었을 테니까.


다른 모든 종류의 공포나 불안감이 그러하 듯 종종, 꽤 자주, 죄책감은 내 행동을 제어하는 기제가 되었었다. 어릴 때는 아주 당연하게 가장 죄책감을 가지는 대상이 부모님이었다. 세상의 모든 부모는 자신의 어린 자식을 아주 조금씩이라도, 필연적으로 가스라이팅하게 되지 않나? 어떤 당위성이나 논리적 근거를 하나하나 차근히 알려주는 것보다 일단 자식이 규율에 복종하도록 하기 위해서 말이다. 나는 내 기준에 꽤 자주 혼나며 자란 편인데, 그 때문에 이런 압박에 대한 두려움이 상대적으로 큰 편이었다.


영화 <유전>(감독 아리 애스터, 2017)에 보면 자식이 잘못을 저지른 후 그 잘못에 대해 부모가 알아채는 것을 두려워하는 감정을 굉장히 정확하고 극단적으로 그려낸 시퀀스가 있다. 피터가 급격한 알러지 반응 때문에 위급한 상황인 동생 찰리를 차에 태우고 과속하여 칠흑같이 어두운 시골길을 달리던 중, 창 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있던 찰리가 전봇대에 부딪혀 죽게 되는 사건이 벌어진다. 피터가 직접적으로 찰리를 죽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피터는 아직 한참 어린 찰리를 데리고 외출해 제대로 돌보지 않았고, 그 때문에 견과류를 먹은 찰리는 이미 목숨이 위태로운 상태였고, 그 와중에 피터가 운전하던 차에서 불의의 사고를 당했다. 찰리의 시체를 차에 싣고 집에 돌아온 피터는 다음 날 엄마가 차에서 찰리를 발견할 때까지 방에서 나오지 않는다. 영화는 찰리를 발견한 엄마 애니의 비명이 들려올 때까지 방에 누워있는 피터의 얼굴을 계속해서 클로즈업 한다. 학원을 땡땡이 치거나, 집안의 비싼 물건을 상하게 하고서, 외출에서 돌아온 부모님이 나의 잘못을 알아챌까봐 전전긍긍 해 본 기억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클로즈업 장면에서 참을 수 없이 불편하고 두렵고 극도의 불안을 느낄 것이다.


성인이 된 지도 꽤 시간이 지난 지금은 이렇게 극도의 불안과 죄책감을 느끼진 않는다. 하지만 여전히, 부모님의 외출 제안을 거절하는 것처럼 아주 사소한 일에서도 죄책감을 느끼긴 느낀다. 내가 부모님을 즐겁게 해줘야 할 의무가 있는 것도 아니고, 아주 중대한 부탁을 거절한 것도 아닌데, ‘내가 잘못을 한 건 아닐까’라는 불안이, 마치 모기향의 가느다란 한 줄기 연기처럼 아주 작게 그러나 확실한 냄새를 내며 스멀스멀 피어 오른다.


타인이 없어도 인간에게 죄책감이 생길 수 있을까? 나의 잘못에 대해 꾸짖거나 벌을 줄 외부의 존재가 단 하나도 없다고 가정한다면, 죄책감이 성립할 수 있을까? 결국 죄책감은 타인이 존재하기 때문에, 외부의 규율이 있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타인이 없는 세상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하니까 아마 이런 종류의 공포도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매일 내 속에서 되풀이 되고 있을 것이다. 별 것 안해도 매일 피곤한 이유가 있다니까.

매거진의 이전글 로맨틱 코메디 공식을 변주하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