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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od night and Jun 29. 2020

평택제천고속도로의 노트

2016년 2월

- 엄마는 우리 어릴 때부터 어딘가에 저렇게 한푼 두푼 모아놓은 돈이 많았어. 그런 점은 언니가 빼다 박았지. 중고등학생 때부터 항상 ‘엄마, 나 수학 여행 안 갈테니까 그 돈 나 줘’라고 해서 받아다 항상 어디다 모아놓곤 했어. 우리 집에서는 항상 나를 제일 공들여 키웠다고 하는데, 사실 생각해 보면 그렇지도 않아. 언니 대학 편입할 때 아버지가 돈 뭉치를 이만큼 싸들고 서울 갔었다니까. 그것도 한 번에 그렇게 된 것도 아니야. 큰오빠가 그 때 서울에서 자취하면서 무슨 기타 레슨 받는답시고 알고 지내던 음대 교수가 있는데, 그 사람한테도 거의 1년간 계속 봉투 갖다주더니, 하루는 큰오빠가 집에 내려와서 엄마랑 아버지랑 방에 들어가서 뭐라고 속닥속닥 얘기하더니, 아마 어디어디 줄이 닿았다고, 될 것 같다고 그렇게 얘기했는갑지? 그러더니 아버지가 현금을 이만큼 가지고 서울 가서 음대 총장 만나고 와서, 언니는 대학도 그렇게 편입했어. 대학 다닐 때는 큰오빠랑 둘이 연희동 교장님 집에서 자취할 때도 엄마가 명동에 있는 바니걸스가 옷 맞춰입는 의상실 — 우리 때는 바니걸스가 최고의 패셔니스타였으니까 — 에서 항상 풀세트로 맞춰다 입혔어. 집에 내려와 있을 때 그 옷들 예쁘게 빼입고 친구들이랑 몰려다니면서 드나드는 거 보면서 엄마가 엄청 좋아했고. 그런데 내가 그 옷 몰래 훔쳐 입고 나갔다 오면 엄마가 언니한테 ‘얘, 쟤가 입은 게 훨씬 예쁘다’해서 언니 기분 상하게 하고 그랬지. 언니도 집에서 못 받고 자란 건 없어 그러니까 사실. 나는 성적이고 대학이고 다 내 힘으로 했는 걸 뭐. 과외는 항상 비싼 거 받았어도.      



- 처형은 지원을 돈으로 받은 거고 사실 정서적인 서포트는 당신이 다 받은 거지.

- 뭐, 그건 그래. 내가 언니처럼 공부 못 했으면 나도 그렇게 해줬겠지 집에서. 큰오빠한테 유일하게 대들던 사람도 집에서 나 뿐이었고. 큰오빠랑 언니랑 자취할 때도 언니가 항상 집에 와서 큰오빠 흉 보고 그랬는데. 언니가 맨날 집에서 밥 해 주고 빨래 해 주고 살림하는데 오빠는 나가서 매일 연애하고 돌아다니고… 주말에 여학생이랑 등산 간다고 언니한테 도시락 싸게 시키고, 그럼 엄마가 또 언니가 오빠 수발 드느라 고생한다고 집에서 쌀 보낼 때 그 안에다 몰래 봉투 넣어서 보내고 그랬지. 쌀 푸다 보면 저 안에 봉투랑 편지 들어있고, 뭐 그렇게.

- 배달 사고 날까봐?

- 응, 그 때는 아는 사람 시켜서 심부름값 줘서 보내고 그랬으니까. 큰오빠는 자기는 그러고 놀러 다니면서 언니한테는 또 엄청 엄하게 굴었다던데. 매일 9시에 집에 오라고 잔소리 하고 조금만 늦으면 버스 정류장 나가서 기다렸다가 데리고 들어오면서 ‘기집애가 어딜 늦게 싸돌아다녀’라면서 잔소리 퍼붓고. 자기는 맨날 여학생 꽁무니 쫓아다녔으면서… 예과 2학년인가 3학년 때는, 자기 코가 낮아서 못 생겨서 여학생들한테 인기 없다고 엄마 아버지한테 졸라서 코 수술도 받았어.


그런 게 다 각자 유전자가 있나 봐. 오빠는 그렇게 돈 쓰는 거에 있어서 언니나 엄마랑 조금도 안 비슷했으니까. 그러고 코 수술 받아서는 한 일주일 입원해 있는데 누워있기 심심하다고 그 며칠 동안 보려고 이렇게 조그마한 소니TV, 그 당시엔 소니가 제일 비쌌는데도, 그걸 사 가지고 보고 있더라고 언니가 와서 엄청 흉을 보더라니까. 하여간 오빠는 어릴 때부터 그랬어. 집에다 대학 교재 필요하다고 얘기해서 돈 받을 때도 예를 들어 2만 5천원이 필요하면 4만월이라고 부풀려서 말하는거야. 그 다음에 남은 만 오천원으로는 연필, 지우개, 원고지, 편지지, 이런 걸 사다가 자기 책상 서랍 맨 윗칸에 넣고 잠가 놔. 그러고선 언니랑 둘째 오빠랑 나한테 이제부터 학용품 필요하면 자기한테 사서 쓰라고 강요하는 거야. 난 그 때 매일 글 써서 백일장 나가고 이러니까 나한테는 원고지 사게 하고. 나한테는 대문 나가는 척하면서 뒷문 어디로 돌아와서, 자기 방 책상 서랍 열쇠가 어디 있으니 그걸 찾아와서 서랍 윗칸을 열고 원고지를 빼고 거기다 돈 얼마를 두라고 시키는거야. 언니랑 둘째 오빠한테는 어디 길 어느 횡단보도로 오라고 시키고. 그래서 그 두 사람은 매일 거기를 막 왔다갔다 하는거야, 큰오빠한테 학용품 사러. 그러고 모은 돈으로는 맨날 서울 올라가서 우표를 막 사와. 집에다 모아놓은 우표가 이만큼이 있었어. 사고쳐서 결혼할 때도, 급하게 부랴부랴 결혼 시키는 데도 자기는 조선호텔에서 최고급으로 하고 싶다고, 지금 웨스틴 조선 호텔 거기 말야. 그래서 아버지가 또 돈 엄청 썼지. 그 당시에 그렇게 바닥에 새빨간 융단 촥 깔려있는 예식장도 얼마 없었어.


둘째 오빠는 또 큰오빠랑 다르게 풍채도 좋고, 머리는 주먹만 하고 얼굴은 이쁘장하게 생겨서 항상 여자애들한테 인기가 엄청 많았어. 나 대학 가고서 둘이 그 교장 댁 2층에서 살 때, 그 집 딸이 또 오빠를 어찌나 좋아했는데. 오빠는 붙임성도 좋고 말도 넉살 좋게 하고, 그래서 여자애들이 더 정신 못 차렸어. 둘이 언제 그렇게 친해졌는지 오빠가 그 집 딸 걔랑 같이 교회도 나가 주고 그랬다니까. 우리 집에 오빠 찾는 전화도 엄청 왔었지. 그 집에서 ‘2층 남매는 둘 다 인물이 좋아서 저렇게 인기가 많나 보다, 우리 집보다 전화가 더 많이 오네’라고 할 정도였어. 그 집 딸이 전화 오면 그렇게 부리나케 달려가서 전화를 받아주더라니까. 여학생이 오빠 찾는 전화면 항상 나한테 ‘오빠 여자친구야?’라고 물어보고. 오빠 때문에 여학생들이 나한테 엄청 들러붙어서 잘해줬었어. 오빠는 아주 애기 때도 그랬어. 데리고 나가기만 하면 없어졌대. 엄마 아버지랑 서커스 구경 가서도 없어지고, 그래서 맨날 엄마가 ‘그렇게 없어지더니 나중에 혼자 미국 유학까지 갔다’고 했었어. 한 번은 동네에서 데리고 나갔다가 또 없어졌는데, 온 동네를 뒤지다가 어디서 찾았냐면, 이웃에 애가 없는 부부가 있었는데 그 집에서 데려가서 밥 먹이고 목욕 시켜서 재워놓고 두 부부가 한참 들여다 보고 있더래. 애기 때부터 예쁘게 생겼었거든.

- 유괴 아냐, 유괴?

- 요즘 같으면 바로 신고했겠지. 근데 또 오빠가 그 집 아저씨 아줌마한테 ‘어머니 아버지’ 부르고 있더래. 길 잃고 울고 있으니까 그 사람들이 와서 엄마 어딨냐, 집 어디냐, 했는데 애기고 하니까 모른다고 하면서 막 울었겠지? 그래서 집에 데려가서 밥 먹이고 씻겨 주니까 기분 좋아서 엄마 아빠라고 했나봐 그 사람들한테. 둘째 오빠는 그랬어, 어릴 때부터. 그러니까 다 같은 부모한테서 나왔어도 물려받은 유전자가 다 다른가봐.

- 그리고 그 금수저들 중에서도 당신이 제일 공주였고?

- 그렇지, 엄마 아버지 둘 다 나라면 껌벅 죽었으니까. 아무도 큰오빠한테 찍소리 못하는데 나 혼자 엄청 대들었고, 큰오빠도 나한테는 쩔쩔 맸지. 한번은 초등학생 때 동네 애들 다 데리고 와서 마당에서 숨바꼭질 하면서 시끄럽게 노는데 큰오빠가 ‘조용히 해’라고 하더라고. 보통 언니랑 오빠는 그러면 한번에 조용히 하거든. 근데 난 항상 ‘싫어’ 그래. 큰오빠가 몇 번을 조용히 하라고 하다가 내가 말을 너무 안 들으니까 ‘너 혼난다’ 하더니 나를 잡아서 들었다가 바닥에 탁 내려놨어. 그 때부터 내가 소리 지르고 바닥에 누워서 팔다리를 뻗대면서 우는데, 오빠가 미안하다고 쩔쩔 매면서 막 사과하고. 근데 나는 사과고 뭐고 엄마가 와서 오빠 혼낼 때까지 우는게 목적이었는데, 엄마가 나가서 너무 안 오는거야. 한 한시간을 그러고 울다가 너무 힘들어서 나중에는 눈물도 안 나오는데 입으로만 ‘으앙으앙’ 소리 내면서 누워 있었던 기억이 나. 그러다 엄마가 들어오는 걸 보고 다시 막 소리지르면서 우는 척 하고. ‘엄마 나 귀가 안 들려’ 막 이러면서(웃음). 딱 한번 큰오빠가 나한테 크게 손찌검 했을 때가, 아버지 돌아가셨을 때 엄마가 항상 큰오빠랑 상의해서 뒷처리를 다 했었는데 그 때 둘이 많이 싸웠어. 한번은 큰오빠가 엄마한테 큰 소리 내길래 내가 들어가서 엄마한테 큰 소리 내지 말라고 뭐라 했더니 오빠가 뺨을 때렸어. 그 때 엄마가 오빠한테 제일 크게 화냈던 것 같아. ‘애비없는 동생한테 손찌검 하는 천하의 못된 놈’이라고 하면서 내 손 붙잡고 일어나서 나가자고, 꼴 보기 싫다고 엄청 화냈었어. 그 때 큰오빠가 놀라서 울면서 잘못했다고 빌면서 나한테 했던 얘기가 자기도 불쌍한 사람이라고, 너는 항상 나가서도 예쁨 받고 살지 않냐, 자기는 집에서나 왕 노릇 하지 나가면 무시당하고 그런다고 그런 얘길 했었는데.


- 할 말 없어서 그냥 둘러대는 자기 변명 같은데?

- 맞아, 그냥 미안하다고 하기 싫으니까 이것저것 변명 한 거야. 암튼 아버지 돌아가신 직후에, 엄마는 매일 방에서 혼자 기도하다 울고, 나는 나대로 탈진해서 매일 방에 대짜로 뻗어 누워있고, 새언니는 양쪽 방 드나들면서 매일 밥 해대고 그럴 때도, 내가 엄마한테 ‘엄마, 나 서울 갈래.’라고 했더니 엄마가 ‘그럴래?’라고 하더니 바로 일어나서 나 데리고 서울 올라가서 자취방에 넣어놓고 며칠을 매일 나가서 세간살이를 사오더라니까. 진짜 누구 표현대로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더라고. 큰오빠 그 때도, 엄마 통장에 그 동안 혼자 따로 몇 천만원인가를 모아놨다고 그랬었잖아 막. 아버지 돌아가시고 나서 몇 십년이 지났는데 그 동안 어떻게 돈을 모은 건지. 암튼 대단해, 엄마는. 내가 그런 점은 엄마를 닮았어. 내 힘으로 문제를 해쳐 나가려고 하는 거. 그 때 얘기했잖아, 자취방 구하러 돌아다니다가 그 들어가기 힘들다는 명동 기숙사 들어간 것도, 명동 시내에서 돌아다니는데 어디 근처에서 여자애들이 슬리퍼 신고 수건 같을 걸 들고 돌아다니길래 근처에 어디 기숙사가 있나 해서 기숙사 건물까지 따라갔다가, 거기 사감한테 ‘여기 들어오려면 어떻게 해야 해요?’라고 물어봐서 대기 번호 적고 왔다고. 그리고 난 운도 따라주는 편이야. 나중에 연락와서, 들어가서 어떻게 나한테까지 대기 순번이 돌아왔냐고 물어보니깐 지역 별로 할당 인원이 있는데 청주에서 온 대기자가 나 딱 한 명이었더라고.

명동 기숙사는 사설 기숙사라 규율도 느슨한 편이었어. 통금이 9시였는데 인원 체크도 방문 앞에 있는 팻말로만 했거든. 그래서 연애하느라 밤늦게 안 들어오고 이런 애들이 자기 방문 팻말 돌려 놔 달라고 부탁하고 나가고 그랬지. 나중에 들어간 연대 학교 기숙사는 훨씬 엄격해서 실물이 있어야해서, 통금 시간 되면 방문 앞에 나와서 둘씩 서 있어야 했어.

- 군대 점호랑 똑같네.

- 그런 분위기였지. 사감이 무용 전공한 노처녀였는데, 통금 시간 되면 빤딱빤딱하게 콜드 맛사지 한 맨 얼굴로 체육복 입고 양 옆에 기숙사장 두 명 데리고 복도 돌아다니면서 인원 체크 하고 그랬어. 한 번은 우리 방에서 그 사감하고 수다를 떨다가 무슨 얘기가 나왔는지 우리가 노래를 해달라고 졸랐어. 무용 전공한 사람이라 키가 호리호리하고 얼굴이 뾰족하게 생긴 사람이었는데, 그 날은 비가 추적추적 오는 늦여름이었고, 그 사람이 일어서서 노래를 부르는데 엄청나게 가늘은 목소리로 패티 김의 ‘초우’를 부르는 거야. ‘가슴속에 스며드는 고독이 몸부림 칠때 갈 길 없는 나그네의 꿈은 사라져 비에 젖어 우네 너무나 사랑했기에…’ 우린 정말 그런 노래 부를 줄 모르고 신이 나서 시킨건데. 나이 많은 혼자 사는 여자가 빗소리를 배경으로 그렇게 가늘은 목소리로 그런 노랠 부르니까 일순간에 모두 숙연해지고 정말 어쩔 줄을 모르겠더라. 그 사람 부모님이 그 광경을 봤으면 정말 가슴이 미어져서 우셨을 걸.  


https://www.youtube.com/watch?v=vO77Nw9jolk


전화기는 복도 맨 끝에 한 개가 있었는데, 전화 오면 수신자마다 모스 부호처럼 고유 부호를 지정해서 벨소리로 알려줬었어. ‘짧/긴/짧/긴’ 하면 나, ‘짧/짧/긴/짧/짧/긴’ 하면 누구, 이런 식으로. 친한 애들끼리는 서로 부호를 아니까 먼저 들으면 ‘야 영희야 너 전화 왔다!’이러면서 알려주기도 하고 그랬지. 지금도 생각나는 애 중에 한 명은 광주에서 온 리틀 앤젤스 출신 음대 친구였는데, 머리 드라이를 기가 막히게 잘해서 별명이 ‘드라이 박’이었어. 누구 미팅 나간다 그러면 ‘내, 내, 내가 드라이 해줄게’이러면서 온 기숙사 애들 머리를 다 드라이 해줬어. 말도 엄청 더듬었거든. 그렇게 말을 더듬는데도 미팅도 엄청 주선하고, 말을 진짜 웃기게 해서 걔가 해주는 얘기 들으면 다들 배를 잡고 데굴데굴 굴렀었어. 노래할 때는 말 안 더듬는대. 리틀 앤젤스 들어간 것도 초등학생 때 집 마당에서 고무줄 하고 놀다가 라디오에서 리틀 앤젤스 모집한다는 방송을 듣고, 엄마한테 얘기도 안 하고 그냥 그 길로 방송국 가서 오디션 보고서는 합격해서 됐다는 거야. 그래서 어릴 때부터 유럽이고 어디고 세계를 다 돌아다녔대. 영국 여왕 앞에서 합창 한 적도 있다더라.


그런데 그 친구가 80년에 광주 사태 이후로 완전히 변해 버렸었어. 자기가 광주에서 뭘 보고 들었는지 우리한테는 얘기도 잘 안해줬어. 그 전에는 엄청 쾌활하고 명랑했었는데, 애가 머리가 이상해진 게 아니라, 그냥 명랑하고 밝은 모습이 싹 사라져 버렸어. 그 뒤로는 말도 안 더듬었어. 그러더니 갑자기 전에 소개팅 해서 알고 지내던 6살 많은 대머리 아저씨랑 결혼을 하더라고? 우리 다 깜짝 놀랐었는데. 그 사람이랑 만나고 들어왔을 때 우리가 어땠냐고 물어봤더니 ‘대, 대, 대머리’라고 한 마디 해서 우리 또 다 배꼽 잡았었거든. 전화 오면 대머리라고 엄청 싫어하고. 그런데 갑자기 왜 그 사람이랑 결혼했냐고 물어봤더니, 그 동안 남자를 많이 만났어도 5.18 때 광주에 내려가 있을 때 계속 집으로 전화 해서 자기 안부 묻고 걱정해 주고 서울 올라 와서도 계속 만나서 챙겨주고 돌봐 준 사람은 그 아저씨밖에 없었대. 광주 사태 이후로 자기 안에서 뭔가가 사라져 버린 것 같았고 그대로는 제정신으로 살 수가 없을 것 같았는데 그 사람하고 있으면 괜찮아질 것 같아서 졸업도 하기 전에 그렇게 결혼 해 버렸다고 하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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