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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od night and Jun 29. 2020

미술관에 간다 2

2015년 9월


예술가들이 그려내는 세계가 대중에게 온전히 가닿기 힘들다는 내용을 쓴 적이 있다. 예술 작품 뿐 아니라 모든 커뮤니케이션의 모습이 그러한데, 이런 모습은 언어학에서는 사용하는 ‘기호’라는 개념에 빗대어서도 설명할 수 있다.


간단하게 이야기 해 우리가 사용하는 커뮤니케이션 체계를 기호라고 한다면 이 기호는 ‘기표’와 ‘기의’로 이뤄져 있다. 기표는 우리가 사용하는 음성과 문자 등 내용을 전달 할 수 있는 매개체들이다. 넓게 확대해서 보자면 음성과 문자로 이루어진 언어 뿐 아니라 이미지와 영상을 포함하고 있는 모든 미디엄들이 기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기의는 여기에 담겨 있는 의미다. 발신자는 기표에 기의를 담아(인코딩) 상대에게 전달하고, 수신자가 이 기표 속에 담긴 기의를 해석하는 과정(디코딩)을 거쳐 커뮤니케이션(기호)이 이루어진다.


이런 모습을 가장 간결하면서도 효과적으로 표현할 줄 아는 사람은 르네 마그리트다. 그의 그림들 중에서도 아래의 파이프 그림은 형식과 의미의 관계를 가장 단적으로 보여준다.



정갈하게 그려진 커다란 파이프 밑에는 이렇게 쓰여있다.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우리는 은연 중에 기표와 기의가 필연적으로 엮여있다고 생각한다. 가령 ‘파이프’라는 단어를 들으면 우리는 아주 자연스럽게 긴 관이 있고 연기를 내뿜는 구멍이 있는, 나무나 쇠로 만들어진 물체를 떠올린다. 하지만 그 물체는 ‘파이프’라는 이름을 가지고 태어나지 않았다. 연기를 내뿜을 수 있는 관과 구멍을 연결한 물체를 만든 다음 사람들이 그것을 ‘파이프’라고 부르기로 합의한 것 뿐이다. 우리는 그 합의에 동참하고 있기 때문에 ‘파이프’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비슷한 물체를 떠올리지만 ‘파이프’라는 이름은 임의로 붙여진 것이기 때문에 이 물체의 이름은 언제든 다른 것이 될 수 있다. 그것을 ‘사과’라고 부를 수도, ‘비행기’라고 부를 수도 있다. 혹은 그냥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부를 수도 있다.


기표와 기의는 이렇게 필연적이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물리적 세계에 실존하지 않는 개념들에 대해서도 상상하거나 사고하고 그것을 언어, 이미지, 소리 등에 가둘 수 있다.


우리가 통칭 예술이라 부르는 것들, 그리고 미디어라 부르는 것들의 형식은 모두 가상(Simulacra)이다. 그것들은 태초부터 자연적으로 존재해 온 세계가 아니고 인간이 커뮤니케이션을 위해 직접 창조하고 조작한 세계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 가상의 세계 안에 담긴 것은 실재하는 세상의 모습이다. 인간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도 상상할 수 있지만, 상상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상상하지 못한다. 상상력은 결국 인간의 인지선상에 존재하는 것들을 조합한 경우의 수다. 그러니 간단히 말해 결국 우리는 실존하는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가상의 형식을 만들어내는 셈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텔레비전 뉴스에서 가난과 질병으로 죽어가는 아이의 모습을 보고 있을 때, 실제로 우리가 보는 것은 죽어가는 아이의 모습 그 자체가 아니다. 우리가 보는 것은 죽어가는 아이의 모습을 녹화한 영상이다. 직접 그 아이의 옆에 있다면 느꼈을 미약한 숨결과 식어가는 체온은 모두 실재하는 것이지만, 안락한 거실 소파에 앉아서 보는 스크린 속 비참한 모습은 가상이다. 수전 손택은 ‘타인의 고통'에서 이렇게 미디어를 통해 타자화 되고 낯설어진 고통의 모습이 우리의 연대와 공감을 가로막는다고 이야기 한다.      




다시 미술관 이야기로 돌아가서 — 나는 그래서 오히려 은유로 꾸며진 가상 세계에서 타인과 연대하는 법을 찾는다. 사실에 충실하기보다 강조, 과장, 축소 등을 마음껏 사용할 수 있는 예술의 세계가 어떤 면에서는 저널리즘보다 더욱 리얼한 미디엄처럼 느껴진다.


잘려진 동물의 육체 단면과 해골 위에 화려하게 장식된 다이아몬드를 보며 삶과 죽음의 표상에 대해 생각한다. 어둡고 깊은 밤 덩그러니 불이 켜진 바를 그린 유화를 보면서는 불면의 밤을 보내는 이들의 깊은 외로움을 생각한다. 노란 옷을 입은 맥도날드 캐릭터와 군인들의 시체가 널브러진 그로테크스한 디오라마를 볼 때는 우리가 살아가게 될 디스토피아를 생각한다.


가상은 때로 현실보다 강력하다 . 가상과 현실은 분절된 경계 없이, 모래사장에 밀려오는 파도처럼 서로 넘실대며 경계를 흐트러트린다. 미술관에 가는 것은 그 파도에 발을 담그러 가는 것과 같다. 그 바다에 발을 담그는 것은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이해하려는 노력의 일부기도 하다.


<살아있는 자의 마음 속에 있는 죽음의 물리적 불가능성>, Damien Hirst, 1991



Nighthawks, Edward Hopper, 1942



The Sum of All Evil, Chapman brothers,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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