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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od night and Jun 29. 2020

Shade of Summer 2

2016년 3월 방콕


습기와 매연이 뒤엉켜 뿌옇게 가려진 시야에 지지 않겠다는 듯 모든 것이 튀고 반짝였다.



방콕은 도시가 크기도 큰 데다 도로 사정이 아주 안 좋은 편이어서 직선거리로는 얼마 되지 않는 거리도 차로 이동하면 꽤 오래 걸렸다. 교통체증도 심할 뿐더러 일방통행인 도로가 대부분이어서 한 블럭을 지나가도 뱅뱅 돌아가야하는 일이 다반사다. 덕분에 나는 뒷자리에 앉아서 시내 드라이브 하는 듯한 기분으로 창 밖 구경을 하다가 졸다가 하기를 반복할 수 있었다. 더위에 지쳐 꾸벅꾸벅 졸다가 고개를 들면 거대하고 화려한 금테를 두른 액자 속의 푸미폰 왕과 시리낏 왕비와 눈이 마주치곤 했다.



태국인들은 모두 엄청나게 친절하고 모든 것을 대충 했다. 영수증과 거기 써 있는 숫자와 판이하게 다른 거스름돈을 함께 건네며 상냥하고 공손하게 웃어주는 사람들이었다. 카페나 마켓은 주 4일이나 3일만 운영하는 곳이 태반이었고 호텔 프런트에 무언가를 부탁할 때마다 직원들은 항상 경청하며 열심히 받아적은 다음 한 번도 들어주지 않았다. 타는 듯한 더위 속에서 타이 아이스티나 패션프룻 주스를 쪽쪽 빨며 이렇게 친절하고 허술한 사람들이 화려하게 반짝이는 불단 앞에 합장하는 모습을 쳐다보고 있으려니, ‘여행을 왔으니 뭐라도 해야지’라는 결심이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결국 나는 일주일 내내 늦잠을 자고, 밥을 먹고, 시원한 음료나 맥주를 마시고, 무언가를 멍하니 바라 보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빈둥대며 보낸 방콕에서의 일주일은 꽤 독특한 시간이었다. 방콕에 가야만 하는 이유를 가지고 설레면서 간 것도 아니고 애초에 추위와 너무 남아도는 시간의 지겨움을 피해 도망치는 듯한 기분으로 떠났었으니까, 그냥 여름 속에 있다는 것에만 만족하며 일주일을 보냈다. 정말 문자 그대로 아무것도 안 하고 쉬기만 한 것은 사실 아닌데, 모든 것을 즉흥적으로 결정하며 보낸 일주일은 내가 시간을 꽤나 사치스럽게 낭비할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처럼 느끼게 해 기분이 좋았다. 이질적인 풍경들과 날씨, 아무의 눈치도 보지 않고 낭비할 수 있는 시간 자원은 아예 다른 차원으로 도피한 것 같은 느낌도 들게 했다.


인천 공항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의 버스 안에서, DMB를 이어폰 없이 크게 틀어놓고 ‘시댁과의 갈등을 잘 참고 살다가 아들을 낳아서 인정받았다’는 이야기를 하는 여자가 출연하는 토크쇼를 시청하는 할아버지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그제서야 내가 속한 차원으로 되돌아온 것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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