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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od night and Jun 29. 2020

2016년의 일들

2016년 9월


한 동안 블로그에 글을 올리지 않았다. 글을 계속 쓰긴 썼는데,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일기가 대부분이었다. 무언가 주제를 삼아 쓰기엔 올해에는 한 동안 나 자신 외에는 다른 것에 관심이 없었다(지금도 좀 그런 것 같고). 이야기를 만들어 써 볼까, 하고 몇 개월 동안 짤막한 이야기를 몇 개 썼는데 지금 와서 읽어보니 다 이상하고 허접한 것 같아 그만 두었다. 이야기를 만들어서 쓰면 필자는 그 뒤에 숨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러기엔 내 이야기 솜씨가 너무 빈한했다. 최근에 사람들이 많이 보는 잡지에 글을 쓸 일이 있었는데 처음엔 자신이 없어서 안하겠다고 하려다 뭐라도 해봐야 자신감이 생기겠지 싶어 결국엔 썼다. 정해진 주제에 맞추어 기한 내에 써내는 건 힘든 일이라고 새삼 느꼈고 무엇보다 글을 썼으면 남들에게 보여줘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혼잣말만 쓰다보니 통신 능력도 떨어지고 문장을 공 들여 쓰는 법도 거의 잊어버리다시피 했다. 나에게 있어서는 쓰는 행위가 십자수를 놓거나 춤을 추는 것처럼 마음이 편하고 해소되는 기분을 느끼게 해주는 취미인지라 문자도 결국은 커뮤니케이션이라는 걸 머릿속 저 뒤편에 제쳐두고 있었다. 항상 ‘나 좋으려고 쓰는 건데 뭐’라는 생각으로 혼자 찌끄리곤 했는데 계속 그렇게만 해선 의미가 없을 것 같다. 개인적인 이야기든 무엇에 관한 시선이든 누군가 이것을 읽을 것이라 생각하고 다듬어 가며 써보기로 한다. 이루려는 목표가 있다기보단 하는 김에 잘 해 보면 좋을테니까, 잘 하는 일이 하나라도 있으면 어디라도 써 먹을 곳이 있을지 모르니까.



최근에 넷플릭스에서 제작한 다큐멘터리를 자주 보는데 소재도 다양하고 편집도 유려하게 잘 된 것들이 많다. 그 중 <셰프의 테이블>이 가장 좋다. 시즌 1에서는 유럽이나 미국에서 미슐랭 스타를 받은 셰프들을 주로 출연시켰다가 시즌 2에서는 세계 각지의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을 조명하고, 가장 최근에 나온 프랑스 에디션에는 정통 프렌치에 새로움을 접목 시키는 프랑스 셰프들이 등장한다. 미장센도 아름답고, 음악도 우아하고, 아름답게 플레이팅 한 음식이 나오고, 안 좋아할 이유가 없는 영상이긴 하지만 우울하거나 지루할 때마다 이 다큐멘터리를 반복해서 보는 가장 큰 이유는, 다른 걱정 없이 자기가 하고 싶은 것만 좇는 사람들이 나온다는 거다. 당연히 그 사람들 인생에 다른 걱정이 없는 건 아니겠지만 어차피 이 다큐멘터리에는 그런 잡다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그들이 어떻게 자신들을 최고 셰프의 반열에 올려 준 레스토랑들을 만들게 되었는지, 어떻게 질병이나 가난 같은 장애물들을 극복하고 복귀했는지 등의 이야기에만 집중 한다. 이 영상 속 세계에는 절망 따위는 없고 오로지 절망할 뻔 했던 사건들을 딛고 일어선 성장만이 있다. 그리고 항상 이 다큐멘터리의 주인공 셰프들은 지금 하는 일보다 더 새로운 것, 더 색다른 것을 찾고 있다. 그러니까 <셰프의 테이블>은, 추하고 어그러진 것 없이 아름다움과 희망만이 존재하는 13인치 모니터 속의 완벽한 세계다.




요즘 매일 인터넷만 하고 책을 읽어도 논픽션을 주로 읽다 보니 글을 읽는 호흡이 너무 짧아져 긴 소설을 하나 샀다. 새라 워터스의 <핑거스미스>를 샀는데, 묘사가 아주 자세하고 플롯이 복잡해 이야기가 정말 길었다. 중간에 그만두고 싶었지만 폐활량을 늘리는 훈련이라 생각하고 끝까지 읽었다. <핑거스미스>는 주인공도, 로맨스도, 이야기를 꼬아놓는 악역도 모두 여자들의 몫이어서 그 부분이 흥미로웠다. <채식주의자>처럼 억압되어 있던 여성성이 해방되는 과정을 묘사하는 작품들도 훌륭하지만 요즘은 <핑거스미스>나 리메이크 된 <고스트 버스터즈>처럼 평범한 스토리텔링에서 여성들이 다양한 캐릭터를 보여주는 이야기들에 더 끌린다.


나는 어릴 때부터 여자가 등장하지 않는 소설이나 영화에는 전혀 흥미가 없었는데, 이제서야 내가 감정이입을 할 수 있고 때로는 롤모델 삼을 만한 캐릭터를 찾아왔다는 걸 깨달았다. 대중 문화의 모든 요소들이 여성을 항상 성애의 대상으로만 비추어 왔고, 아주 가끔 주인공 역할을 맡기더라도 연애관계에서만 주체가 될 수 있도록 했기 때문에 항상 나의 선택지는 극히 적었다. 로맨스가 없더라도 여자들만 등장하는 이야기가 있을 수 있고 다양한 역할(히어로, 악당, 과학자, 그리고 놀랍게도 ‘남자의 조수’도 아니고 ‘섹시한 의상’을 입지 않아도 되는)의 여자들이 있을 수 있다는 것. 당연한 것인데 지금에서야 읽어낼 수 있게 된 이 관점 덕분에 나의 세계는 점차 넓어지고 있다. 20대까지 거의 다 보낸 이제서 말이다. 좀 더 어릴 때 이걸 알았더라면 지금보다 좀 덜 염세적이 됐을지 모른다. 세상을 좀 더 긍정적으로 볼 수 있었다면 글에는 취미를 붙이지 않았을 지도 모를 일이다.




내 핸드폰에는 작년 11월에 찍은 선홍빛 방어회 사진이 있다. 그 날 낮에 광화문에서 열린 민중총궐기 대회에 갔다가, 이미 전경 버스로 사방이 막혀서 집회 대오 근처에도 못 가보고 바깥 쪽에서 서성이기만 했다. 코트와 패딩 점퍼를 입어야 하는 날씨에 아랑곳 않고 버스 울타리 안으로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살수차의 물줄기를 눈 앞에서 바라볼 때 할 수 있는 말은 별로 없다. 화가 난다는 말도, 그만 하라는 말도, 어이가 없다는 말도 다 아무 의미가 없었다. 물줄기에 섞여서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캡사이신 때문에 매워진 눈을 비비며, 스카프로 코를 틀어막고 광화문을 빠져 나왔다. 우리가 지나온 길로는 구급차가 연달아 도착하고 있었다. 그 날 밤엔 연남동에서 방어회를 먹으며 소주를 마시고 노래방에 가서 고래고래 노래를 부르고 늦게 집에 돌아왔다. 술도 마시고 노래도 불렀지만 울적한 기분은 그대로였다. 술을 마셔서 더 감상적이 됐는지도 모르지만. 집에 와서 민중총궐기 대회를 촬영한 기사 사진들을 검색해 보며 나는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 내가 방어회 사진을 찍고 있을 즈음, 아니면 그 직전에 횟집에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을 즈음 얼굴에 살수차를 정통으로 맞고 쓰러진 사람의 영상이 올라와 있었다. 구급차에 실려가는 그 순간까지도 캡사이신 때문에 로션처럼 하얗게 된 물대포가 그 분을 좇아갔다. 그러고서 1년이 조금 안 된 지금, 그 분은 퇴원하지 못하고 돌아가셨고 경찰에서는 부검을 할 합법적 권리를 얻었다. 나는 더 이상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생각하든 의미가 없게 되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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