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4월
20대 시절에는 우울과 위악으로 무장한 일상을 보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사춘기라고도 하던데 난 그 단어가 가진 평면성이 싫어서 그런 식으로는 잘 표현 안 한다. 사춘기라고 하면 ‘그냥 그럴 나이가 돼서 누구나 겪는 그런 시기'라는 뜻인데, 남이 보기에 뭐가 어찌 됐든 사람이 그러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내가 20대를 그렇게 보낸 가장 큰 이유는, 나는 세상이 원하는 사람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사회에 나가야 할 나이가 됐는데 우물 안 개구리처럼 살다가 20대가 되고서야 세상을 내다보니 온갖 저열한 기준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고, 내가 그 동안 아무 생각 없이 중고등학교를 나오고 수능을 치러 대학에 온 것처럼 그 기준들을 계속해서 통과해 나가야 하는데, 그때가 돼서야 갑자기 ‘이렇게 계속은 못 살겠다'는 생각이 드는 거다.
하지만 그냥 단호히 ‘이렇게 안 살래'라고 결심 했다면 그렇게 우울한 척 하지 않았을 텐데. 내 진짜 문제는 어느 무엇도 명확하게 결심을 하지 못 했다는 것이다. 세상의 기준이 너무 저열하고 모두가 정해진 기준에 맞춰 나가야 한다는 게 말도 안 된다고 생각 했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면 결국 ‘낙오자’가 될 것이라 생각했고, 낙오하지 않으려면 취직도 하고 때 되면 결혼도 해야 할 텐데 도저히 그러기 위해 밟아 나가야 하는 모든 과정을 나는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너무나도 하기 싫어서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객관적으로 별로 그렇게 힘든 상황도 아닌데 혼자 패배주의를 방패 삼아 모든 것을 회피하며 우울을 전시하며 20대를 보냈더랬다.
하지만 몇 년이 지나 그건 사실이 아니란 걸 깨달았다. 물론 세상은 추잡하고 사람들은 언제나 누군가에게 손가락질 하길 좋아한다. 다양성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로는 외치면서도 어딘가 다른 구석이 있는 사람을 가장 흥미로운 안주거리 삼고 숨 쉴 때마다 혐오를 한다. 내가 얻은 건 ‘세상은 알고 보니 살만한' 같은 종류의 뜬구름 잡는 깨달음이 아니다. 내가 깨달은 건, 내가 세상에 받아 들여지지 않아도, 사람들이 날 미워해도, 사실 내가 사는 데에는 별로 상관이 없다는 점이었다.
이런 사실을 아무도 가르쳐준 적이 없었기 때문에 난 그저 배운대로, 남들이 사는 대로 나이에 맞추어 무언가를 ‘이뤄가며’ 살지 않으면… 살지 않으면 어떻게 되지? 사실 어떻게 될지 상상조차 해본 적 없고 할 수도 없었다. 사람들이 2019년 4월 이전에 블랙홀에 대해 상상한 것처럼 그냥 새까만 진공으로 모든게 빨려 들어가 사라진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우리는 이제 블랙홀의 모습을 그릴 수 있게 되었다. 블랙홀의 모습을 그리며 알게 된 것은 블랙홀에도 끝이 있고 빠져나올 수 있는 곳이라는 점이다. 그러니까 사실은, 블랙홀과 마찬가지로 나의 미래도 제대로 그려보지 않아서 몰랐던 것 뿐이지, 아무것도 없이 모든 게 사라지는 건 아니었던 거다.
가장 중요한 건 뒤쳐지거나 낙오한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었다. 세상이 그렇게 생겼는데, 뭐 어쩌라고. 이건 경주가 아니다. 그냥 사는 거다. 다 각자의 방법이 있다. 모양새야 어찌 됐든 잘 살아 있으면 된다.
이 사실을 깨닫고 나니 모든 것이 훨씬 쉬워졌고 훨씬 명확해졌다. 나는 생긴대로 살면 되고 잘할 수 있는 것을 하면 된다.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증명하기 위해 애를 쓸 필요도 없고 누군가가 되기 위해 노심초사 해야 할 필요도 없다. 이렇게 살아도 미래는 그대로 존재하고 나는 사라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