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Good night and Jun 29. 2020

Dazed and Confused

2019년 4월

20대 시절에는 우울과 위악으로 무장한 일상을 보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사춘기라고도 하던데 난 그 단어가 가진 평면성이 싫어서 그런 식으로는 잘 표현 안 한다. 사춘기라고 하면 ‘그냥 그럴 나이가 돼서 누구나 겪는 그런 시기'라는 뜻인데, 남이 보기에 뭐가 어찌 됐든 사람이 그러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내가 20대를 그렇게 보낸 가장 큰 이유는, 나는 세상이 원하는 사람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사회에 나가야 할 나이가 됐는데 우물 안 개구리처럼 살다가 20대가 되고서야 세상을 내다보니 온갖 저열한 기준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고, 내가 그 동안 아무 생각 없이 중고등학교를 나오고 수능을 치러 대학에 온 것처럼 그 기준들을 계속해서 통과해 나가야 하는데, 그때가 돼서야 갑자기 ‘이렇게 계속은 못 살겠다'는 생각이 드는 거다.

하지만 그냥 단호히 ‘이렇게 안 살래'라고 결심 했다면 그렇게 우울한 척 하지 않았을 텐데. 내 진짜 문제는 어느 무엇도 명확하게 결심을 하지 못 했다는 것이다. 세상의 기준이 너무 저열하고 모두가 정해진 기준에 맞춰 나가야 한다는 게 말도 안 된다고 생각 했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면 결국 ‘낙오자’가 될 것이라 생각했고, 낙오하지 않으려면 취직도 하고 때 되면 결혼도 해야 할 텐데 도저히 그러기 위해 밟아 나가야 하는 모든 과정을 나는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너무나도 하기 싫어서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객관적으로 별로 그렇게 힘든 상황도 아닌데 혼자 패배주의를 방패 삼아 모든 것을 회피하며 우울을 전시하며 20대를 보냈더랬다.


하지만 몇 년이 지나 그건 사실이 아니란 걸 깨달았다. 물론 세상은 추잡하고 사람들은 언제나 누군가에게 손가락질 하길 좋아한다. 다양성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로는 외치면서도 어딘가 다른 구석이 있는 사람을 가장 흥미로운 안주거리 삼고 숨 쉴 때마다 혐오를 한다. 내가 얻은 건 ‘세상은 알고 보니 살만한' 같은 종류의 뜬구름 잡는 깨달음이 아니다. 내가 깨달은 건, 내가 세상에 받아 들여지지 않아도, 사람들이 날 미워해도, 사실 내가 사는 데에는 별로 상관이 없다는 점이었다.


이런 사실을 아무도 가르쳐준 적이 없었기 때문에 난 그저 배운대로, 남들이 사는 대로 나이에 맞추어 무언가를 ‘이뤄가며’ 살지 않으면… 살지 않으면 어떻게 되지? 사실 어떻게 될지 상상조차 해본 적 없고 할 수도 없었다. 사람들이 2019년 4월 이전에 블랙홀에 대해 상상한 것처럼 그냥 새까만 진공으로 모든게 빨려 들어가 사라진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우리는 이제 블랙홀의 모습을 그릴 수 있게 되었다. 블랙홀의 모습을 그리며 알게 된 것은 블랙홀에도 끝이 있고 빠져나올 수 있는 곳이라는 점이다. 그러니까 사실은, 블랙홀과 마찬가지로 나의 미래도 제대로 그려보지 않아서 몰랐던 것 뿐이지, 아무것도 없이 모든 게 사라지는 건 아니었던 거다.


가장 중요한 건 뒤쳐지거나 낙오한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었다. 세상이 그렇게 생겼는데, 뭐 어쩌라고. 이건 경주가 아니다. 그냥 사는 거다. 다 각자의 방법이 있다. 모양새야 어찌 됐든 잘 살아 있으면 된다.


이 사실을 깨닫고 나니 모든 것이 훨씬 쉬워졌고 훨씬 명확해졌다. 나는 생긴대로 살면 되고 잘할 수 있는 것을 하면 된다.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증명하기 위해 애를 쓸 필요도 없고 누군가가 되기 위해 노심초사 해야 할 필요도 없다. 이렇게 살아도 미래는 그대로 존재하고 나는 사라지지 않는다.

매거진의 이전글 4월 이야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