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2월
올해의 TV쇼 : 퀸덤
케이팝의 여자 아이돌들이 걷는 길은 험난하다. 다른 사회의 모든 자리들에서 그러하듯이, 그들은 남자 아이돌들이 남자라는 이유로 손 쉽게 얻는 기회와 자비를 자연스럽게 누리지 못한다. 늘 더 많이 웃을 것을, 더 날씬하고 더 예쁠 것을 요구받는다. 그렇게 완벽에 가까운 모습으로 준비를 하더라도 연말 시상식에서 7팀의 남자 아이돌이 출연할 때 여자 아이돌은 단 두 팀이 출연한다(2019 MAMA). “컴백 전쟁”이라는 노골적인 부제를 보면, 처음 엠넷에서 퀸덤이라는 프로그램을 기획했을 때도 이 점을 염두에 뒀을 것으로 추측된다. 좁은 우물 안에서 서로 머리채를 잡고 싸우는 여자들의 모습, 바이럴을 타기에 더 이상 좋을 수 없는 ‘여적여’ 혹은 캣파이팅 컨셉 말이다. 하지만 역시 마찬가지로, 다른 사회의 모든 자리들에서 그러하듯이, 진정한 서바이벌 혹은 밥그릇 싸움의 정공법은 주어진 자리를 가지고 서로 겨루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자리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퀸덤이 가지는 의의는 그것이다. 짜여진 틀에 맞춰 맡겨진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하는 것이 아이돌의 역할이라 생각했었지만 퀸덤에 출연한 6팀의 여자 아이돌들은, 노래와 춤을 선보이는 무대를 통해 자신들이 가고자 하는 길을 스스로 명확히 가리켜 보였다. 특히 아이들(G-Idle)은 마지막 경연에서 스스로 준비한 왕좌에 앉는 퍼포먼스 피날레를 선보이며 더 이상 직접적일 수 없을 정도로 분명히 이야기한다. 퀸덤의 여자 아이돌들은, 사람들이 그 동안 자신들을 둘러싼 논쟁들 — 성 상품화와 섹스 어필의 경계선, 루키즘을 내포한 여성혐오의 답습에 대한 논쟁 등 — 에만 몰두해 잊고 있었던 사실, 그들도 자신들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해 자신들만의 생각이 있는 개인들이란 점을 상기시켰다.
그리고 우리는 좀 더, 특히 여자 아이돌들이, 자신들만의 길을 갈 수 있도록 격려해야 한다. 케이팝은 근 몇 년간 많은 젊은 케이팝 가수들을 잃었고 그것이 무엇을 시사하는지, 지금도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돌아봐야 할 때다. 아이돌이란 개념 자체는 상품이지만 그 역할을 수행해내는 것이 사람이란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올해의 홀로서기 : 림 킴 & CL
2019년이 되기 전까지, 한국인들의 뇌리에 가장 강하게 남아있던 림 킴의 인상은 슈퍼스타 케이의 미국 오디션에서 그 때까지 들어본 적 없던 새로운 음색으로 자미로콰이의 노래를 부르던 소녀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경연 회차를 거듭할 수록 노래 실력으로 더더욱 이름을 알리며, 그와 더불어 메이크업 팀과 스타일링 팀의 조화로 점점 더 하얘지는 피부와 밝아진 색깔의 원피스를 선보이며 리메이크 노래들을 부르다가, 방송이 끝난 뒤에는 이렇다 할 화제성 없이 몇년 간 대중들 사이에 회자 되지 않았었다. 그러다 2019년, 그녀는 돌연 이지 팝 보컬리스트가 아닌 아방가르드 아티스트가 되어서 컴백했다.
CL의 솔로 앨범이 공개 되자마자 유튜브는 그녀의 앨범을 기다렸던 팬들이 눈물을 흘리는 리액션 영상으로 가득 찼다. 팬들의 입장에서는 오랜만에 그녀의 노래를 듣고 영상을 볼 수 있다는 점도 반가웠겠지만 새로 나온 노래 가사와 영상은 누가 보더라도 그녀가 가수로서 활동하지 못하는 동안 얼마나 답답하고 힘든 시간을 보냈는지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기에, 그녀를 좋아하는 팬들에게는 더 특별하게 다가왔을 것이다.
림 킴과 CL의 홀로서기는 솔로 아티스트로서의 도약이란 점에서도 훌륭하지만 그녀들 곁에 서 있는 지지 그룹의 모습을 사람들이 함께 볼 수 있다는 점에서도 더 의미가 있다. 림 킴과 CL은 자신이 원치 않던 모습을 강요 당하던 과거에 대해 솔직하게 말하고, 앞으로는 잘하든 못하든 상관없이 자신의 길을 갈 것이라고 선언한다. 림 킴의 각종 작업과 CL의 뮤직 비디오 속에 등장하는 친구들과 동료들은 그녀들의 선택을 의심하지 않고 무한한 응원을 보낸다. 자신이 아닌 모든 것을 끊어내고 혼자 길을 찾아 나서는 여자들과 그녀들의 동료들을 보여주는 것만큼 미디어가 보여줄 수 있는 고무적이고 진취적인 콘텐츠가 또 있을까.
올해의 TV 드라마 : 믿을 수 없는 이야기
피해자의 이야기가 사실이라는 가정에서 출발할 때와 거짓이라는 가정에서 출발할 때 범죄 수사의 방향성은 현저히 달라진다. 그리고 생각해 보면, 피해자의 증언에 대해 경찰이 처음부터 거짓의 가능성을 그렇게 많이 열어두고 수사를 진행하는 범죄는 성범죄 외에는 본 적이 없다. 마치 가해자로 지목된 자의 무죄를 증명해 내는 것이 수사의 목적인 것처럼 말이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믿을 수 없는 이야기> 가 훌륭한 점은 여성간의 눈물겨운 연대나 서로의 아픔을 이해하는 감동의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법을 집행하는 주체들이 최소한으로 견지해야 할 태도가 사회를 어떻게 바꾸는지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이 드라마는 물증을 확보하기가 어렵고 물리적 피해를 증명하는 것도 온전히 피해자의 몫인, 유달리 까다롭고 힘겨운 성범죄라는 현상에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가에 대해 이야기 한다. 피해자의 증언만이 가장 많은 정보를 제공해 줄 수 있는 상황에서, 피해자에게 정신적 압박이 가해졌을 때와, 상대적으로 안정된 심리 상태에서 증언을 했을 때 수사에 어떤 진전 혹은 퇴보가 있는지 보여준다. 남자 수사관들과 여자 수사관들의 차이는 ‘여자의 마음을 이해하는' 점이 아니었다. 두 수사팀의 가장 큰 차이는, 피해자의 증언을 반박하고 의심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아니면 피해자의 증언을 바탕으로 수사를 진행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였다.
이 드라마는 전체적인 흐름과 모든 디테일에서 자신들이 이야기 하고자 하는 바를 직접 실천하고 있기도 하다. 용기를 내 이야기 하는 피해자들에게 적어도 최소한의 예의는 갖춰야 한다는 점을 말이다.
올해의 영화 : 벌새
이미 이 블로그에 한번 쓴 적 있기 때문에 길게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 같다. <벌새>는 가장 내밀한 이야기가 가장 큰 감동을 줄 수 있다는, 한 편의 증명이다.
올해의 소설 : 일의 기쁨과 슬픔(장류진)
21세기의 한국 문학은 많은 여성 작가들을 필두로 변모해 왔다. 문학의 정석처럼 취급되던, 폭력을 포함한 모든 자신의 행동의 원인을 소시민으로서의 회한으로 돌리던 토종 한국 남자들의 이야기는 이제 놀림감으로 전락했다. 시한부 판정을 받은 초라한 남자 가장이 자신을 온전히 이해하는 단 한 사람 ‘업소 여자'와 불륜을 하고 ‘자신의 슬픔을 모르는 가족들을 위해 끝까지 희생하는' 내용의 <아버지> 같은 소설들 말이다. 내가 초등학교 고학년 때 어린이 필독도서 목록에 있었던 책인데(그 때 나와 친구들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의문만 가득한 독후감을 써서 냈었다) 20년만에 ‘토종 문학'은 몰락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2019년 한국 여성 작가들의 시선은 건조하고 시니컬 한 동시에 유머러스 하다. 19년의 ‘한녀'들은 가슴을 치며 통곡하지 않지만 심드렁한 표정 아래 갖가지 감정을 숨기고 있다. 자신들이 매일 마주하는 거대한 부조리와 코메디에 가까운 세상, 일부러 그러는 건가 싶을 정도의 전형적 역할을 수행하는 회사, 동료, 상사, 모든 주변 환경과 구성원들에 대해서 순식간에 오만가지 생각을 하지만 매일 무표정을 장착하고 최대한 감정을 배제한 어투로 말한다. “마음대로 하세요.”
<일의 기쁨과 슬픔>은 요즘 시대 화이트 칼라들의 하나의 아이콘이 된 장소 판교와, 마찬가지로 어떤 표상이 된 스타트업이라는 키워드를 조합한 현대식 블랙 코메디다. 이 소설의 이 문장들을 읽고 있으면 철근과 전면 유리로 된 (부정적 의미로)눈이 부신 판교의 건물 숲이 눈앞에 떠오르고 그 눈부신 허허벌판에 부는 찬 바람마저 느껴진다. 몇십년이 흐른 후 한국의 근현대 문학 교과서에 2019년을 대표하는 단편이 한 개 실려야 한다면, 바로 이 소설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