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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od night and Jun 29. 2020

시대유감

2020년 2월

삼풍 백화점이 붕괴 되었던 해에 나는 초등학교 1학년이었다. 1995년 6월은 우리집이 서초동에 이사온 지 1년이 채 안 됐던 시점으로 기억한다. 복도식 아파트였던 무지개 아파트 10동의 1층에 살았었는데, 옆집 친구 S와 단짝이었어서 학교에서 돌아오면 우리 엄마가 직장에서 돌아오기 전까지 항상 동생과 함께 그 집에 놀러 가 있었던 기억이 난다. 당시에는 물론 전혀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집은 우리집보다 훨씬 부잣집이었는데, S의 어머니는 ‘유학파' 출신의 성악가였고 아버지는 가끔 뵈었던 것 같은데 거의 기억이 안 나지만 어쨌든 유학을 다녀온 예술가 집안이 대부분 조부모 때부터 엄청난 부자라는 건, 내가 대학생이 다 돼서야 알게 된 사실이었다. 우리 집은 그 때 막 서민에서 중산층으로 편입하고자 노력하는 맞벌이 부부 집안이었다. 물려받을 재산은 없지만 좋은 직장에 다니며 알차게 저금하면 서울에 번듯한 아파트를 장만할 수 있다는 꿈이 허락된 시대였다. 부모님이 많은 대출을 받아 굳이 서초동에 있는 아파트를 찍어서 이사온 것은 중산층 생활의 시작인 동시에 한국적 꿈의 성취였다.


부모님은 자수성가(성공의 폭이 작더라도 어쨌든 상향 이동에 성공 했다고 친다면)한 사람들이라 주소지를 통해 자신들의 계급을 드러낼 줄은 알았어도, ‘모태 부자'들처럼 어떤 브랜드를 소비하고 어떤 문화를 향유함으로서 계급을 드러내는 방법은 그 때까지 전혀 몰랐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부모님의 경제 관념은 칼뱅주의적 프롤레타리아에 가까웠다. 나는 S의 어머니가 같이 데려가 줬을 때 처음 극장에 가보았고, 그 때 처음 더빙이 아닌 자막이 있는 외화 영화를 보았고, 그 영화는 디즈니 <라이온킹>이었다. S네 집에서 처음 비디오 테이프로 마이클 잭슨의 <문워크>뮤직비디오를 보고서야 그런 옷을 입고 그런 춤을 추는 사람이 전세계 톱스타라는 것도 처음 알았고, 마찬가지로 그 집에서 비디오 테이프로 <스페이스잼>을 보고 세상에 마이클 조던이라는 이름의 농구선수가 있다는 걸 알았다. 나는 이런 경험을 부지런이 우리 가정 내에 전파했고 우리 집도 얼마 안 가 매번 극장에서 개봉하는 디즈니 만화를 보러 가고 동네 비디오 대여점에서 헐리웃 영화를 빌려 와서 보는 여가가 정착 됐다. 새내기 중산층답게 아빠는 소나타도 장만했다. 온 가족이 차를 타고 압구정에 간 적이 있었는데 거기서 나는 오렌지족을 실제로 처음 봤고 얼굴에 피어싱을 하고 머리에 반다나를 쓴 남자를 보고 겁에 질렸었다. 엄마는 권사님 모친을 둔 장로교 신자답게 성경적 비유를 즐겨 쓰는데 로데오 거리가 ‘소돔과 고모라'라고 했다.


S의 어머니는 삼풍 백화점에서 쇼핑을 즐겨 했다. 당시 동네 어른들의 표현에 따르면 삼풍 백화점은 ‘사치스러운' 곳이었다. 우리 가족은 단 한번도 삼풍 백화점에 가본 적이 없다. 삼풍 백화점에는 비싼 브랜드가 많고 수입품이 많다고 했다. 그래서 그 곳에서 쇼핑하는 사람들은 사치스러운 취향을 가졌다는 결론이었다. 그렇구나, 생각했다. 사치스럽단 어감에 담긴 상대적 부자에 대한 반감을 읽어내기엔 난 너무 어렸다. 부자들의 이너 서클 안에서도 급을 나누기를 즐겨하며 선거철이 아니면 절대 서로 의견을 모으지 않는다는 것도 당연히 몰랐다. 서초동에 모인 대부분의 사람들은 박정희 시절의 호재로 득을 본 사람들이며 당연하게도 보수주의자들이라 “과시적 소비는 졸부들의 저열한 취미”라는 것이 동네의 정론인 줄도 몰랐다. 그 동네에서 성인이 될 때까지 자라고 나서야 실제로 부자이되 부자인 척을 하면 안되고 하지만 부자인 티가 안 나서도 안되는 ‘처신'을 둘러싼 고도의 신경전이 매일 펼쳐지고 있음을 감지했다.


삼풍 백화점이 붕괴된 시각은 오후였다. 그 날 S의 어머니는 오전에 삼풍 백화점을 다녀왔고 평소보다 멀미가 나는 것처럼 컨디션이 안 좋아서 일찍 돌아왔다고 했다. 난 오후에 그 집에 놀러 가 있었다. TV에서 붕괴된 백화점의 모습이 속보로 떴다. 난 그 당시 S네 집의 구조 상 TV가 어느 쪽 벽에 있었는지까지 기억이 나지만 내가 무엇을 느꼈는지는 조금도 떠오르지 않는다. 어린이들을 포함한 집 안의 모든 사람들이 계속 선 채로 뉴스를 봤던 모습밖에 기억이 안 난다.


KBS 다큐멘터리 <모던코리아>의 ‘시대유감-삼풍' 편을 보면서 나는 내가 기억하는 모든 것이 얼마나 정확한지 깜짝 놀랐다. 하지만 여전히 그 당시 뉴스를 보고 느꼈던 감정은 기억 나지 않는다. 어쩌면 미디어 속에서의 간접 경험을 통해 무언가를 느끼기에는 아직 세상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던 나이였을지도. 인터넷이 없던 시절이라 다행이었을지 모른단 생각을 지금에서야 한다. 사람들이 서로의 의견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표출하는 데에 꽤 많은 거리낌이 있던 시절, 욕 먹을 걱정이 덜 했던 사람들은 더욱 잔인하고 노골적으로 이야기 하길 즐겼다. ‘부실공사'가 시대의 키워드였지만 사람들은 사회의 구조적 문제나 박정희 시대부터 유착되어 온 건설회사의 비리 같은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삼풍 백화점이 있던 동네 사람들은 자신들이 비극의 주인공이 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하고, 누구네 집의 누구가 거기서 죽었다고 수근댔고, 그게 다였다. 드러내놓고 말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은근하게 과소비의 상징이던 삼풍 백화점이 붕괴된 데에는 인간계를 넘어선 초월적 힘이 작용했을 지도 모른단 요지의 이야기들에도 고개를 끄덕거려 주었다.


뭔가 더 있었을 지도 모르지만 그게 내가 기억하는 당시 동네 분위기의 전부다. 직접 사고에 연루되지 않은 사람들에게 그것은 자극적 사건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동시에 주변의 아무도 자신들이 유가족이라고 밝히지 않았다. 수근대는 동네에서 살아나가기 위해서는 절대 입 밖에 내어 말할 수 없었을 거라고도 생각한다.


어린 나에게 어른들이 의식적으로 이야기를 차단한 탓도 있겠지만 어쨌든 그런 이야기는 서초동에선 달갑지 않은 화제였다. 모든 일엔 이유가 있고 하나님의 뜻이 있다고 받아들이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사람들은 그렇게 무너진 건물과 죽은 사람들을 정말 빨리 잊어버렸다. 잊었다는 표현이 정확한 지도 모르겠다. 애초에 잊으려면 머릿속에 담아두었어야 하는데, 그들의 머릿속에 붕괴된 것들이 얼만큼 담겨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2000년대 초반의 새로운 계급적 붐은 주상복합 아파트였다. 더 이상 무지개, 우성 같은 이름은 아파트 브랜드로 쓰이지 않았다. 가든스위트, 아크로비스타, 두산위브 같이 못해도 4자는 넘어야 했고 알파벳은 꼭 들어가야 했다. 외관은 유리와 철근을 주로 써 미래적 느낌을 줘야 했고 아파트 내에 주민들을 위한 헬스장, 라운지 같은 편의시설이 반드시 있어야 했다. 삼풍 백화점이 있던 자리에는 대림 건설의 아크로비스타가 세워졌다. 그 소식을 듣고 나는 기분이 이상했다. 그런 비극이 있었던 자리에 사람이 머물러 사는, 최신 유행 주상복합 아파트를 짓는다고? 동네 어르신들은 미묘한 표정으로 그 집의 평당 가격을 논하며 삼풍 백화점 때문에 분양이 빨리 마무리 안될 것이라고 했다. 그 집에 이사 가게 된 사람들은 쿨하게 ‘찝찝하지만 무슨 일 있겠어?’라고 보란 듯이 경쾌하게 말했다. 지하 주차장에서 주민이 호출하면 집까지 데려다 주는 경호원이 온다는 소문도 있었다. 그 때 중학생이었던 나는 이런 이야기들을 들으며 느낀 감정을 그냥 복잡한 기분 정도로 생각했지만 지금 돌이켜 보면 그것은 진한 경멸이었다. 어려도 나이 많은 어른을 경멸할 수 있다는 사실을 15살 당시에 알았더라면 아마 나는 마음껏 어른들을 혐오 했을 것이다.


스스로 내 생각을 결정할 수 있게 되고, 내가 7살 때부터 자라온 동네가 아닌 다른 많은 동네들과 한국 밖의 많은 나라들을 혼자서도 갈 수 있게 되고, 수전 손택의 책을 읽고 이해할 수 있게 되고, 쓰지 못했던 수만가지의 단어와 문장을 쓰게 되고서야 얼마나 세상이 이상한 곳인지 정리가 됐다. 시대는 바뀌어도 유감은 계속된다. 


2020년에도 ‘세월호'라는 단어를, 그 사고와 아무 상관 없고 어찌 보면 책임이 있는 이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이해관계를 자극적으로 표현하는 하기 위해 거리낌 없이 끌어다 쓰는 모습을 보며 여전히 역겨운 유감을 느낀다. 성수대교와 삼풍 백화점은 20세기에 무너졌고 지금은 21세기가 된지도 20년이나 지났는데도 여전히 사람들은 타인의 고통을 대하는 예의 한 가지도 학습하지 못 했다. 나는 여전히 속이 메슥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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