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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od night and Sep 18. 2020

픽션 #2

몸은 멀리, 마음은 가까이

피곤하다. 3일째 집 안에만 있었는데도 몸이 너무 피로했다. 회사는 몇주 간격으로 출퇴근과 재택근무 공지를 번갈아 내리고 있었다. A는 컴퓨터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자신의 발 밑을 알짱대는 말티즈 경남이를 안아 올리며 뒤로 몸을 기댔다. “너무 피곤하다.” 소리 내어 말하는 순간 엄마 열려 있는 방문 앞을 지나가며 대답했다. “맨날 앉아만 있는데 뭐가 피곤해? 진짜 피곤하고 싶으면 일어나서 방이나 좀 치워. 방이냐 돼지우리냐.”


엄마는 요즘 기분이 좋지 않았다. 노래를 부를 때 비말이 가장 많이 튄다는 이유로 다니던 노래 교실이 두달 전부터 잠정 휴업에 들어간 후로는 집 안에서 경남이를 제외하고 이족보행하는 모든 사람에게 자꾸 신경질을 부렸다. 애초에 경남이란 이름도, '경상도 남자'인 아빠 하는 짓이 꼭 개와 같다며 아직 이름이 없던 하얀 말티즈와 만취해 들어와 등산복을 입은 채로 그 옆에 뻗어 누운 아빠를 번갈아 쳐다보던 엄마가 붙인 이름이었다. 다른 좋은 이름을 떠올리지 못한 사이 어느 새 모두의 입에 경남이란 이름이 붙어 버렸다. 그렇게 싫어 죽겠다는 경상도 남자의 준말인데도 엄마는 경남이만큼은 무지하게 이뻐했다. A는 경남이 귀에 대고 "가서 엄마한테 애교 좀 부려봐"라고 속삭인 다음 바닥에 내려 놓았다. 방바닥을 타닥타닥 치며 달려 나가는 경남이의 발소리를 들으며 다시 수십개의 창을 띄워놓은 모니터에 눈을 돌렸다.


뭐부터 해야 했더라. A는 멍하니, 의미없이 습관적으로 여러 창을 번갈아 클릭했다. 회사 계정으로 메일 몇 통이 들어와 있는 것을 확인한 후 메신저를 켜고 접속중이라고 표시 돼 있는 친구 목록을 훑어 보았다. 오랜 친구들과도 매일 메신저로 대화하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만나서 자세히 얘기해 줄게’ 같은 말은 마지막으로 해 본지 몇 개월 된 것 같았다. 묘하게 메신저로 이야기 하니까 대화가 잘 이어지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특히 B는, 요즘들어 A가 하는 말에 사사건건 시비를 거는 것 같았다. 회사에서 스트레스 받을 일이 많나, 결혼식을 계속 연기해야 해서 힘들겠지, 혹은 얼굴 보고 이야기를 못하니 괜히 오해하는 것인가, 같은 생각을 하며 이해하고 노력해 보려고 했지만 B가 보낸 메시지를 볼 때마다 은근히 자신이 무시 당한다는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B는 요즘 결혼 준비를 하며 자신이 겪는 일들을 시시콜콜 그룹 채팅방에 털어 놓았고 같은 경험이 없는 다른 친구들과 A는 '아...' '진짜 힘들겠다' 혹은 그와 비슷하지만 단어만 조금 다른 말들로 대화를 이어가고 있었다. 한번은 A가 '요즘은 예단 안 하는 집도 많다던데 생략하자고 말해보면 안되나?'라고 나름의 조언 비슷한 말을 했었다. 그 대사도 혹시나 자신이 B에게 뭔가 아는 척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을까 10분을 고민하다가 보낸 메시지였다. 사실 그냥 평소처럼 별 의미없이 대답하는 말로 넘어갔어도 됐지만 그 날따라 B가 많이 신경이 날카로워 보였고 그만큼 힘들어하는 친구에게 뭐라도 말해줘야 하지 않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B는 이렇게 대답했다. '인터넷에서나 다들 그렇게 얘기하지 실제 세계에선 할 거 다 하더라.' A는 묘하게 기분이 나빴다. 자신이 기분이 나쁜 것이 맞는지 혼란스러워서 그냥 'ㅠㅠ'라고 다시 대답하는 것으로 대화를 마쳤다. 그룹 채팅방에 함께 있는 다른 친구 C에게도 이야기를 해 본 적은 있었다. 따로 메시지를 보내 요즘 B가 요즘들어 신경질적인 것 같지 않냐고 하자 C는 심드렁하고 간단하게 대답했다. '걔 원래 그래.' 뭐라고 딱히 대답할 말이 없어서 깜박거리는 커서를 쳐다보며 손가락을 멈추고 고민하는 사이 연달아서 다시 메시지가 왔다. '넌 항상 생각이 너무 많아.' 좋은 평가인지 나쁜 평가인지 아리송했다. 평가가 아닐지도 몰랐다. 


쓸데 없는 생각 그만 하자며 고개를 도리도리 젓고 메일 내용을 확인 하려 하는데 같은 팀의 동갑내기 D에게서 회사 메신저가 왔다.

- 점심 먹으니까 졸려 죽겠다.

- 점심 뭐 먹었는데?

- 피자ㅋㅋㅋ 미쳤지 그 기름진걸 세 조각이나 먹고. 후, 요즘 안 그래도 집에만 있어서 돼지 됐는데...

A의 손이 키보드 위에서 잠깐 멈칫 했다. D는 누가 봐도 ‘돼지’가 아니었다. ‘아니야 네가 돼지는 무슨’이라고 해야하나? ‘나도 요즘 완전 돼지ㅠㅠ’라고 동조 해야하는 걸까? 그런데 요즘 'ㅠㅠ'를 아무 곳에나 너무 많이 쓰는 것 아닌가? 그리고 실제로 난 돼지인가? A는 일어나서 거울 앞으로 가 티셔츠를 들어올리고 자신의 배를 쳐다 보았다. 딱히 배불뚝이는 아니었지만 배를 조이는 바지 고무줄 위로 살이 조금 튀어나와 있었다. 이게 돼지인가. A는 여전히 판단이 서지 않았다. 요즘 유튜브나 소셜 미디어를 보면 다들 배가 빨랫판처럼 납작하게 근육이 잡혀 있던데. 그런데 D도 그런 얇고 납작한 근육질의 몸매는 아니었다. 민소매를 입었을 때 보니 팔뚝살이 조금 출렁이던데 그럼 돼지가 맞나? ‘저녁부터 같이 빼자’고 대답해야 하나? A가 답장을 하지 않는 사이 이미 D는 <30분 홈트레이닝 루틴>이라는 동영상 링크를 보내 놓았다. 링크를 클릭하자 스포츠 브라와 레깅스를 입은 여자가 등장해 이것저것 동작을 알려 주었다. 매일 일정 시간 따라하면 살이 빠질 수 밖에 없을 것 같은 혹독한 동작들이었지만 집에서 하기엔 아무래도 층간 소음이 걱정되었다.


그 사이 회사 메신저의 알림음이 연달아 세 번 울렸다. 부장의 메시지였다.

- 어제 이야기 한 그 기획서 자료 조사는 마무리 돼 가나요?

그가 하루만에 문서를 달라고 재촉하는 것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A는 그런 재촉을 받을 때마다 불안한 마음이었다. 어제도 집에서 잔업을 했지만 지금 상태대로 건네주면 잔소리를 들을 것이 뻔했고,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하면 어떤 말로 면박을 줄 지 눈에 선했다. 사무실에 모여서 일을 할 때는 자신이 늦게까지 회사에 남아 있다는 사실을 부장이 모를 수 없었기 때문에 잔소리를 조금 듣더라도 그냥 요구할 때 문서를 건네주고 말았고, 못마땅한 표정으로 스크롤을 드륵드륵 내리더라도 형식 상 '수고했어요'라고 마무리 하긴 했다. 하지만 이제는 혹시 내가 열심히 일하지 않고 놀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잠깐 망설이다가 답장을 보냈다.

- 얼추 돼 갑니다. 오늘 저녁까지 공유 드리겠습니다.

- 네. 저 회사 나와 있고 9시 전에는 안 나갈 것 같으니까 그 전에 주세요.

- 아... 출근 하셨군요.

- 전무님이 그 기획서 빨리 보고 올리라고 하셔서요. 암튼 자료 조사 다 되면 메일로 보내세요.

A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1분 정도 망설이다 부장에게 답장을 하지 않고 D에게 다시 메시지를 보냈다.

- 부장 오늘 회사 나왔다는데?

- 왜?

- 전무가 보자고 했대. 자기 야근할 거라고 오늘 밤까지 리서치 달라는데.

- 또 지랄하네, 미친 새끼.

- 너도 회사 안 나갔지?

- 당연하지, 왜 가냐.

- 나갈 일 없어?

- 야, 있어도 안 가지.

A의 손가락이 다시 키보드 위에서 멈췄다. 그는 다시 창을 바꿔 부장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 저도 내일 사무실 나갈까요?

- 글쎄요. 상황 봐서요. 일단 회사 방침은 재택근무니까요.

상황이라면, 무슨 상황을 어떻게 보라는 거지? A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오늘 회사에 갔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부장이 회사에 가 있는지 집에 있는지 알 방법이 없는데 어떻게 맞춰서 나간단 말인가?

- 알겠습니다.

A는 이렇게 적은 후 세게 엔터 키를 쳤다.


A는 부장에게 메일을 전송한 후 부서 그룹 채팅방에 '일과 보고'라는 제목으로 세 줄 정도의 메시지를 보냈다. 읽음 확인 표시가 뜨는 것을 보고 그녀는 답장이 오기 전 잽싸게 로그아웃을 누르고 컴퓨터의 전원을 끈 후 기지개를 펴며 침대에 누웠다. 모니터와 핸드폰을 너무 오래 쳐다봐서 뻑뻑한 눈을 문지르며 돌아 누으려 할 때 경남이가 침대 밑에 와 매트리스를 앞발로 긁으며 낑낑 거렸다. "넌 맨날 누워만 있냐? 경남이 산책 좀 시켜!" 열린 방문 앞을 지나가던 엄마가 또 호통을 쳤다. 내일부턴 방문 꼭꼭 닫고 다녀야지. A는 속으로 생각하며 배변 봉투와 하네스 줄을 챙겼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신이나서 꼬리를 양옆으로 흔들며 걷는 경남이의 등을 보며 A는 문득 오늘 하루종일 자신이 엄마 외에는 실제 음성으로 대화 한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어제는? 어제도 그랬던 것 같다. 그저께도 그랬나? 기억이 잘 안 난다. 요즘은 날짜도 요일도 가물가물 했다. 사람과 육성으로 대화를 며칠 째 거의 안했는데도 대학생 때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을 때만큼 매일이 피로하게 느껴졌다. 크게 몸을 많이 써서 해야 할 일이 많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매일 몇 십명의 낯선 이들과 몇 마디의 대화를 하고 나면 저녁 때쯤엔 눈꺼풀을 들어올리는 것조차 힘겨울 정도로 피곤했었다. 하지만 우습게도 가게를 마감하고 포스기를 끄고 나면 기운이 솟아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었다. 지금은 집 밖에서 사람과 목소리를 써서 대화할 일이 단 한번도 없는데도 그 때의 그 피로감을 느꼈다. 카페는 문을 닫고 나오면 됐지만 이럴 때에는 무엇을 끝내고 어디로 가야 하는거지? 풀숲에서 킁킁거리다 한 쪽 다리를 들고 오줌을 싸는 경남이의 머리 위로 동사무소에서 건 듯한 현수막 속 문구가 보였다. "몸은 멀리, 마음은 가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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