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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od night and Oct 04. 2020

저 진짜 중2병 아닌데요

존 버거 <다른 방식으로 보기>  

나는 나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과, 통상적으로 논쟁이 있는 어떤 주제에 대해 이야기할 일이 있을 때, 이야기를 시작하기 앞서 내가 ‘빨갱이’, ‘꼴페미’라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을 시작한다. 워낙 보수적인 환경에서 어릴 때부터 자라온 탓에 듣는 사람들이 내가 하는 이야기를 들으며 못 쓰겠다는 듯이 눈을 가늘게 뜨거나 중재한답시고 내 워딩을 좀 더 순화되고 보수적인 표현들을 사용해 “~라는 말이죠?” 같이 완전히 틀린 말로 정리하려고 하는 것에 너무 질려서다. 영어 식으로 표현하자면 마치 내가 '방 안에 코끼리를 들여오는'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 싫어서다. 그래서 처음부터 내가 세상을 좋게 좋게 표현하고 듣는 이의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하는 노력을 전혀 기울이지 않는 사람이란 것을 과장 되게 선언하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러면 모두 내 이야기를 '그러려니'하는 표정으로 듣는다. '그러려니' - 저 사람은 자기 입으로 빨갱이고 꼴페미라니까, 당연히 저런 관점으로 보고 저런 표현을 쓰겠구나 하는 것이다. 


나이가 그다지 엄청 많은 편은 아니어서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사회의 헤게모니가 그다지 크게 변하지 않았기에 아직까지는 사회주의자 혹은 여성주의자인 양, 그런 종류의 급진적인 사상들에 모두 동조하는 척 말하면 다들 그것이 무슨 뜻인지 대충 이해한다. 앞으로는 어떻게 될까? <다른 방식으로 보기>만 해도 1972년 초판이 발행된 책이기 때문에 광고 비주얼에 대한 부분 같은 경우는 이미 존 버거의 견해 자체가 또 하나의 고전적 주장이 된 지 오래다. 추석 연휴에 왓챠에 업데이트된 다큐멘터리들을 쭉 보다가 뉴욕 현대 미술관에서 열린 아브라모비치의 회고전에 대한 기록을 담은 <마리나 아브라모비치가 여기 있다>(제프 듀프레, 2012)를 보았다. 아브라모비치는 이 다큐멘터리에서 자신이 20대에도, 30대에도, 새로운(alternative) 예술가였는데 60대가 된 지금도 새로운 형식의 예술가라고 불린다고 답답함을 담아 농담을 한다. 본인들이 의도한 바와 상관없이 어떤 것은 고전으로 변질되고 어떤 것은 여전히 센세이션으로 남아 있다. 새로운 세대에는 지금과는 또 다른 이데올로기와 수많은 관념들이 생겨날 텐데, 나는 그 새 시대에도 지금처럼 반항적인 시선을 유지하고 있을까. 아니, 내가 유지한다기보다, 내 자세가 그때에도 반항적인 것으로 여겨질까.



나도 당연히 다수란 이유만으로 무턱대고 반대하진 않는다. 나는 대중가요도 많이 듣고 텔레비전에서 방송하는 드라마도 엄청나게 많이 본다. 나에게 혜안이 있는 것처럼 과시하며 대중문화를 즐기고 다수의 의견을 따라가는 이들에게 우월감을 느끼는 사춘기 소녀처럼 살고 싶은 것이 아니다. 굳이 따지자면 나는 내가 다수 대중의 취향에 동조할 수 없을 때 오히려 좌절감을 느낀다. 세상이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곳인 것 같아서다. 다수를 이해하려고 오히려 노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바꿀 수 없는 내 생각 중 하나는, 어떤 ‘지배적’ 시선 자체가 타자에 대한 배제성을 필연적으로 포함하고 있을 거란 의구심이다. 인간이 쓰는 언어에는 절대적이고 완전한 진리가 담길 수 없다. 지금 다수가 그렇게 생각하고 행하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천부적 보편성이라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그래서 기존의 명화들을 해석하는 <다른 방식으로 보기> 속 존 버거의 시선에 고개를 세차게 끄덕거렸다. 고전주의적 그림들의 기법이나 표현된 대상들, 그림을 그린 화가가 살았던 시대상 등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들어왔는데, 그런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무의식 중에 했던 생각은 "옛날 그림이니 옛날이야기를 기준으로 해석하는 것인가 보다"였다. 작품에 담겨 있는 옛날이야기 그 자체에 대해서 현대의 수용자들이 현대적 시선으로 바라볼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다. 루벤스나 보티첼리의 그림 속 여성의 나체를 보며 어떤 예술적 감흥도 느끼지 못했을 때도 단순히 옛날 그림이니까 '옛날엔 이런 그림을 그렸구나' 정도의 해석만 가능하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사실은 지금보다 몇 겹으로 더 단단하게 씌워진 억압과 대상화가 일반적이던 그 시대의 그림 속 여성의 몸이, 현대를 살아가는 여성인 나의 눈에 어떤 울림이나 감동을 주기엔 크게 어긋난 맥락 속에 존재한다고 생각해 보지 못한 것이다.


아브라모비치의 작품에는 많은 누드가 등장하는데 이 누드들은 <다른 방식으로 보기>에 등장하는 고전 회화들이나 70년대 광고 속 누드 이미지와 사뭇 다른 느낌을 준다. 아브라모비치는 나체의 남녀가 서로 마주 보고 선 사이의 좁은 틈 사이로 관람객이 그들과 몸을 스치며 통과하도록 하고 자신의 나체에 상처를 내며 보는 이가 당황스러워하도록 인간의 나체를 전시한다. 수용자의 시선을 섹슈얼한 맥락에서 유혹하기보다 통념적으로 거북하고 보고 싶지 않은 상황을 지켜보도록 오히려 강요하는 편에 가깝다. 이를 보면 고전 속 누드들이 어떤 시선을 의식하고 그려진 것인지 더 잘 보인다. 존 버거가 책에서 설명한 나체를 바라보는 시선의 구속력을 더 명료하게 이해하려면 그가 설명한 기제와 반대 거나 혹은 그 바깥에 있는 작품을 봐야 한다.


https://youtu.be/YcmcEZxdlv4


40대, 50대를 거쳐 노인이 될 때까지 내가 세상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세상이 어떻게 나를 받아들일지는 예측할 수 없다. 사실 세상은 내가 어떤 사람이 되든지 별 관심이 없을 것이다. 고전 회화와 현대의 행위예술을 동시에 봐야만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는 것처럼, 그냥 끊임없이 다양한 것을 흡수하고 소화하며 살아가는 것이 제일 중요할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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