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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od night and Jan 11. 2021

탈권위를 탈출하는 역설의 역설

영화 <더 스퀘어>

권위의 사회적 의미는 무엇일까? 사람마다 생각하는 바가 다를 수 있지만, 나는 다른 다양한 의견에 앞서 1차적으로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개념들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리고 그 개념을 주장하는 사람들과 그 개념으로 수혜를 보는 사람들이 권위자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예를 들면, 현대 경제학은 애덤 스미스가 주창한 개념들에 의해 대부분 설명되니까 소득에 대한 그의 분류(노동, 불로, 재산 소득 등) 개념이 일종의 권위 있는 분류법이고 이런 개념을 설명할 때 계속 이름이 거론되는 애덤 스미스가 경제학의 권위자인 것처럼 말이다. 예술계에서도 걸작으로 유명한 작품들이 있고 그 작품의 창작자들이 예술계의 권위자들이라 할 수 있겠다. 그리고 경제학이나 예술처럼 특정한 분야 안에서가 아니라, 우리의 일상적인 삶에서도 권위는 늘 배어있다.


영화 <스퀘어>에서는 급진적인 작품을 발굴하고 전시하는 미술관 큐레이터의 일상 속에서 일어나는 에피소드들이 나온다. 그는 컨템퍼러리 작가들에게 아방가르드라는 의미를 직접 부여해 주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효과적으로 알리기 위해 고민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영화 속 그의 일상에서는 주로 사회적 계급이라는 입장 차이에서 비롯되는 딜레마들이 끊임없이 작은 사건들을 일으키며 그의 신경을 긁어댄다. 그가 잃어버린 핸드폰의 위치를 보고 고민 없이 빈민가 아파트에 찾아가 전단을 돌렸고 그로 인해 처하게 된 여러 난처한 상황들과, 세븐일레븐에서 만난 구걸하는 여성에게 거의 삥을 뜯기다시피 빵을 사주는 등의 장면(이 부분은 장류진의 단편 <도움의 손길>이 생각나기도 한다)을 보면 우스운 동시에 불편한 마음이 든다. 그 불편한 마음은 주인공이 겪은 불편에 대한 공감이기보다는, 나도 저 주인공처럼 당연한 나의 스퀘어라 생각하며 타인의 바운더리를 인지하지 못한 채 계속 침범하고 있던 것 - 즉 지극히 당연하고 합리적이었던 내 사고의 권위가 도전받는 느낌 때문이다. 핸드폰을 도둑맞은 건 난데, 적선을 베푸는 사람은 난데, 너희는 왜 그렇게 당당한 거야?


https://www.youtube.com/watch?v=EUzRjRv0Ib0


훔쳐간 자신의 물건을 당장 내놓으라는 전단지를 돌리려 크리스티앙과 미카엘이 함께 차를 타고 갈 때, 음악을 틀자 '저스티스'라는 노래가 나온다. 미카엘이 "이거 역설적이네요"라고 농담을 하며 웃자 크리스티안은 갑자기 웃음을 거두고 정색하며 "역설이 아니야."라고 한다. 그냥 농담한 거라는 미카엘에게 크리스티안은 이것은 절대 역설이 아니라고 되풀이 해 말하며 '웃자고 한 얘기에 죽자고 달려드는' 모습을 보인다. 


크리스티안에겐 패러독스라는 개념을 명확히 하는 것이 꽤나 중요하다. 그는 역설, 모순, 현학 같은 관념을 담아낸 오브제를 큐레이팅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의 일은 그것들을 선별하고 구성해서 사람들에게 설명해 주는 것이다. 아마 미카엘이 하고 싶었던 말은 역설이 아니라 뭔가 일맥상통하는 우연의 일치가 신기함을 나타내고 싶었을 텐데, 단어의 뜻을 정확히 몰라 그냥 추상적 느낌이 비슷한 단어인 패러독스를 말했을 것이다. 그리고 크리스티안에게는 그 관념의 불일치가 용납될 수 없었던 것이다. 


역설에 대한 이 시퀀스는 주인공의 존재 자체가, 현대 사회-계급 사회를 나타내는 역설 그 자체임을 나타낸다. 크리스티안은 현대미술의 의미를 이해하고 아방가르드 작가들을 지지하는 힙스터인 자신이 권위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미 타고 태어난 인구통계학적 지표와 사회경제적 지위 상에서, 권위 그 자체다. 그리고 그의 일과 사생활 모든 곳에서 그는 그 권위적인 징표에 속한 사람으로서 임무를 행하고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다. 패러독스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고 추상적인 부가가치 산업에 그 의미를 적용하여 생업으로 삼을 수 있는 사람들의 사회적 지위는 어떨까? 그런 사람들이 운이 없어 가난해질 수는 있어도 그런 일을 통해 부자로 발돋움할 수는 없을 것이다. 부가가치 산업에 종사하며 테슬라를 타는 중산층 백인 남자. 힙스터(대충 앞서가는 세련된 지식인 정도로 정의하자면)를 표방하지만 존재가 기득권 그 자체인 주인공의 모습은 아방가르드의 모습과도 비슷하다.



영화 <더 스퀘어>에서는 실제로 있었던 현대미술들의 에피소드를 차용한 것을 한눈에 알 수 있는 - 전시품을 청소부가 치워버렸다는 부분, 유인원 흉내를 내는 퍼포머가 실제로 여성을 공격하는 장면(Oleg Kulik, <Dog House> 등- 장면들이 있지만 현대미술을 풍자하고자 하는 영화는 아니다. 상부구조의 일부인 아방가르드가 실제 세계의 하부구조와 유리되어 있는 현상을 꼬집고자 하는 것에 가깝다.


포스트모던 시대의 현대미술에서 아방가르드는 기존의 권위에 도전하는 모든 것을 총칭하는 말이 되었다. 다다든, 플럭서스든, 그것이 아닌 다른 무엇이든 아방가르드는 이제 가시적인 형태의 미학보다는 예술이나 사회나 정치든 사회의 모든 구석구석에 존재하는 권위 그 자체에 반대하는 움직임, 즉 사회적 의미 그 자체가 되었다. 아름답거나 추하거나 영상이거나 그림이거나 그 무엇에도 상관없이 아방가르드는 현대미술의 가장 큰 대표성이 되었고 '아티스틱'하다는 것은 자연스럽게 사회에 대한 반항과도 일부 상통하는 뉘앙스를 가지게 되었다.


아방가르드가 그 자체로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관념이 된 지금도, 아방가르드는 권위의 스펙트럼 바깥에 있는 반항아일까? 전 세계의 힙스터들이 다다의 영향을 받았음을 직접적으로 드러내고 포스트모던의 미학들을(어떻게 표현하든 간에) 재생산했다고 주창하는 패션, 디자인 브랜드들을 어디서든 찾을 수 있다. 컨템퍼러리, 시대정신이라는 말은 결국 새로운 반항 정신의 추구와 많은 부분 교차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렇게 당연하게 널리 받아들여지는 것이 권위 아니었나? 결국 아방가르드의 존재의 역설은, 더 많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고 인정받는 순간 본래의 의미가 희석된다는 점 아닐까.


이런 종류의 사고가 으레 그러하듯 당연히 결론은 없다. 하지만 결론이 없으면 글을 마무리 하기가 너무 애매하니, 그냥 내가 좋아하는 경구 정도로 끝맺어 볼까 한다. 어떤 유명한 미국인이 말했던 것인데 그 사람이 누구였는지는 잊어버렸지만 문장만큼은 늘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세상을 바꿔라. 그리고 세상이 바뀌었다면, 또다시 바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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