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Good night and Feb 04. 2021

무언가가 오는 길목에서

어제가 입춘이었다.

한 동안 무엇이든 지금 하자, 일단 하자며 쉬지 않고 걸었던 것 같다. 판데믹이라는 상황 때문에 난생처음 타의로 모종의 자유를 제한받게 된 기간 동안 '나중에 하자고 생각하면 영영 못하게 될지도 몰라'라는 생각을 가장 많이 했던 것 같다. 그래서 뭐 대단한 일을 했느냐면 그건 아니지만 그냥 하루하루 '이런 거 해볼까?'라는 생각이 들면 바로 그 자리에서 시작했던 것 같다. 그러다 보니 본의 아니게 회사 일도 많이 하게 되었고 취미생활이랄지 사이드 프로젝트 같은 것들도 잡다하게 손대며 그냥 여러 가지 소소하게 하루하루 바빴는데 사람이 체력적으로도 그렇고 정신적으로도 그렇게 살다 보면 갑자기 맥이 탁 풀리는 순간이 있다. 꽃샘추위 때문에 한두 차례 다시 추워지긴 하겠지만 매서운 한겨울이 끝났다는 느낌 때문인지 부쩍 요 며칠간 그런 것 같고. 한창 걸을 땐 몰랐는데 멈춰 서보니 발바닥이 아픈 것처럼 그렇게 갑자기 뭔가 한꺼번의 그동안 누적된 지침이 덮쳐 오는 느낌이다.


넘어진 김에 쉬어가야지 싶어서 이렇게 지친 이유를 좀 돌아보는 중이다. 일단 최근 들어서 회사 일을 좀 많이 했는데 하는 일이 사업 개발이다 보니 다양한 분야의 많은 사람들과 하루에도 수많은 다른 주제로 이야기를 해야 한다. 이야기를 하다 답답해서 속으로 가슴을 치고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돼 어리둥절하며 가장 많이 했던 생각은 이거다. 사람이 이렇게까지 다를 수도 있나?


다양성은 중요하고 존중해야 한다는 생각을 늘 마음에 품고 살긴 하는데 어쨌거나 내가 여기서 얘와 한국어로 일 얘기를 하고 있는 건 비슷한 문화권에서 성장해 왔고 사회적 기표 상 얼추 비슷한 것들을 지니고 살았기 때문에 접점이 생긴 건데, 그런 사람들끼리 이렇게까지 생각이 안 맞을 수가 있나? 매일매일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세계관의 게슈탈트 붕괴 현상 같은 것까지 와서 결국 상식이란 허상이고 합리성은 말장난인가, 그 유명한 '여보 감자 반만 깎아놔 줘' 짤방 속 주인공도 어쩌면 틀에 갇히지 않는 천재로 볼 수도 있는 것 아닌지, 결국 인간 세계에 질서란 것은 존재할 수 없으며 영원한 혼돈만이 유일한 질서가 아닌지... 같은 데에까지 생각이 미쳤다.


이러니까 바벨탑 이야기가 나왔지. 무너진 바벨탑을 다시 쌓을 것도 아닌데 별 수 있나 싶어 한 발짝 물러서서 천천히 생각하자, 고 다짐하는데 벌써 입춘이란다. 무엇들이 스쳐 지나갔는지도 모르겠는데 겨울이 벌써 막바지고 블로그에 글을 올린 지 벌써 2주가 넘게 지났고 최소한 일주일에 한 번 업로드하겠다던 내 목표는 벌써 몇 번이고 고꾸라졌다.



몇 년 전 보았던 영화 <다가오는 것들>이 생각났다. 한국식 나이 분류법으로 치자면 갱년기, 장년층에 접어든 여성이 그동안 열심을 다해 몰입해 온 인생의 어떤 요소들이 자신을 떠나가는 동시에 그 빈자리를 채우는 새로운 것들을 함께 맞이하는 모습을 그린 영화였다.


가끔은 그렇게 떠나가는 것들과 다가오는 것들을 가만히 손 놓고 바라만 봐야 하는 때도 있는 것 같다. 무엇이든 손에 잡히는 대로 다 어떻게든 해치우려고 해도, 어차피 갈 것은 가고 올 것은 오게 돼 있으니까 말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스트레스가 좀 덜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입춘 때쯤은 늘 이렇다. 올 것은 온다, 는 마음에 안도하고 조금 편안 해지고. 그런데도 이래 놓고 또 상황 좀 풀리면 해발 몇 미터까지 등산 갈 계획이나 하고 있으니 나도 어쩔 수 없는 한국인인가 싶다.



매거진의 이전글 겨울의 맛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