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의 갤러리들
요즘 클럽하우스 앱을 자주 쓰는데 모더레이터나 스피커는 아니고 철저히 리스너의 입장에서 채널이 아주 많은 라디오를 듣는 것 같은 재미가 있다. 평소에는 원데이 클래스나 강의 동영상을 수강해야만, 혹은 코로나 이전이라면 모임 자리에 직접 나가야 들을 수 있었던 이야기를 침대에 누워서 스크롤 휙휙 내리며 들락날락하며 들을 수 있어서 굉장히 편리하다. 자신이 팔로우 한 사람들, 클럽들의 목록에 따라서 방이 추천되는데 종종 '아트 컬렉팅'에 대한 방들도 핑 돼서 가끔 들어가 보곤 한다. 나는 지구력이 부족하기도 하고 중간에 들어가서 "지금 무슨 얘기 중이에요?"라고 물을 수 없는 이야기를 끈기 있게 들어야 하는 것이 썩 재밌지는 않아 아트 컬렉팅 이야기를 진득하게 들어보지는 않았다. 하지만 한 가지, 그 방에 있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질문은 '어떤 그림(작품)을 사는 것이 좋은 구매인가'였다.
태생이 프롤레타리아라서 그런지 어쩔 수 없이 모든 돈의 사용처에 대해 '가성비'를 생각하게 되는데, 그런 면에서 자연스럽게 예술이 투자 대비 어떤 가치를 가져다주는지 먼저 생각해 보게 됐다. 그렇게 봤을 때 아트 컬렉팅은, 컬렉팅 그 자체로 '갓 성비'가 될 수 없다. 정말 단순하게 개인적인 만족을 위해 돈을 얼마까지 지불할 수 있는지를 가성비의 속성에서 제한다면(이 부분은 개인의 경제력에 따라 상대적 만족감이 될 테니까), 그러니까 가령 내가 나중에 급전이 필요한 상황이 되었다고 치면, 갖고 있던 그림들을 팔아서 생계에 얼마나 보탤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예술 작품을 사고 판다는 것은 사실상 자본주의 시장에서 부동산과 가장 비슷한 형태의 물건이라고 볼 수 있다. 가구나 자동차 같은 물건들처럼 용도가 명확하거나 연식에 따른 따른 가치가 매겨지는 것도 아니고 철저히 수요와 공급의 수량에 따라서만 가치가 매겨진다. 위대한 예술이기 때문에 그만큼 값어치를 가지는 것이다, 라는 말은 많은 사람들이 이 작품이 위대한 예술이라고 인정하고 있다-즉 인지도와 수요가 높다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말이다.
다소 중복된 질문들도 많은 인터뷰집인 <나, 찰스 사치, 아트 홀릭>에서 사치는 작품의 자본적 가치에 대한 질문에 노 코멘트로 일관한다. 자신은 사고 싶은 작품을 살뿐이고 미술계의 '시세'는 자신이 알 바 아니라는 것이다. 아마 사치가 클럽하우스에 들어와서 '어떤 작품을 사는 것이 좋은 구매인가요?'라는 질문을 받으면 질문자를 비웃으며 사고 싶은 걸 사면되지 않냐고 반문할 것이다. 풀어쓰자면 길겠지만 어쨌든 이런 시니컬한 태도는 사치가 가성비를 철저히 따지지 않고 미술품을 구매할 수 있는 사람이라서 가능한 것 같다.
사치의 이런 태도가 바람직하게 지향될 만한 것이냐는 것과는 별개로 사치처럼 '좋아하는 작품을 사는 컬렉터'가 되고 싶냐면, 대답은 당연히 '네'다.
홍콩에 혼자서도 여러 번 놀러 갔음에도 불구하고 사전예약이 너무나 귀찮아 리앙 이Liang Yi 뮤지엄 방문에 번번이 실패했었는데, 소호에 들렀다가 생각난 김에 직접 뮤지엄에 가서 바로 다음 날 방문을 예약한 적이 있었다. 리앙 이 뮤지엄은 100프로 사전예약제에 도슨트와의 개인 투어로만 관람할 수 있고, 리앙 이가 생전에 수집한 수백 점의 청 시대 고가구들이 전시돼 있는 곳이다. 예약된 시간에 도착하면 19세기 영국의 클럽하우스처럼 고풍스러운 작은 응접실에서 잠시 대기하는데 이때부터 약간의 긴장과 함께 기분이 들뜨기 시작했다. 마치 부자, 그것도 그냥 부자가 아니라 귀족 가문의 부자인 지인의 별채에 초대받은 것 같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미술관이라는 환상>에서 저자는 폴 게티 뮤지엄을 예로 들며 개인 컬렉션으로 이루어진 기증자 미술관은 부호의 영묘과 같은 것이라고 표현한다. 일정 수준 이상으로 부를 축적한 사람들의 고민은 그때부터 얼마나 더 돈을 모을지, 어떻게 벌 것인지가 아니라 자신이 소유한 부를 어떻게 세대를 초월한 것으로 만들 것인가이다. 자신이 적립한 부유함이 단순히 일정 시간 동안 쓰고 없어지는 물질이 아니라 한 차원 더 높은 어떤 정신적 세계의 숭고한 가치임을 증명하기 위해 기증자 기념 미술관을 만든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리앙 이 뮤지엄의 대기실에서부터 이 대부호 선생님의 영혼을 접견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는 고가구를 수집하는 부자에서 한 발 나아가 '청 시대의 유물'이라는 일관된 콘셉트로 자신의 컬렉션을 꾸미고 그것을 재단(재단 또한 일종의 사기업이기는 하지만..)이 운영하도록 대물림 함으로써 '리앙 이 뮤지엄'이라는 이름을 후대에 남기며 세미semi-위인의 반열 같은 곳에 스스로를 올린 셈이다. 단순히 돈이 많다고 위인이 될 수 없지만 많은 돈으로 예술 작품을 사면 위인이 될 수 있다.
리앙 이 뮤지엄뿐 아니라 홍콩에 가면 거의 매번 센트럴-소호 지역에 몰려 있는 갤러리들을 마구잡이로 돌아다녔었다. 아트 바젤이 열리는 도시답게 가고시안, 화이트 큐브, 펄램, 리먼 머핀의 자그마한 분점(?)들이 많은 동네인데 재밌는 점은 이렇게 공간이 작을수록 '미술 갤러리'보다는 정말 '가게'의 느낌이 강렬하다는 것이다. 민간(private) 갤러리들을 자주 가보지 않아서 그런 것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 규모 작은 홍콩의 갤러리들에서는 온갖 장식적이고 의례적인 디자인은 전부 배제하고 그림을 사려는 사람들에게 자신들이 판매하는 물건만을 간결하게 보여준다. 그래서 다른 어떠한 위대한 대작이 걸려 있는 장엄한 미술관에서보다도 홍콩에 갔을 때 미술품을 구매하는 신분의 인간이 되고 싶다는 욕망이 강렬하게 들었다. 50평 정도 될까 싶은 도심 속 스튜디오 공간 안에서 본 데미안 허스트의 작품은 마치 백화점 안의 명품처럼 내가 맘만 크게 먹으면 살 수 있는 소비재처럼 보였다.
솔직히 시장의 관점이든 개인적 차원에서든 예술품 구매란 것은 순도 100프로의 작품에 대한 심미안과 예술적 갈망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의 구매자에게 계급주의적 자의식이 작동하지 않나 싶다. "아트 컬렉팅"이란 단어에는 좋은 차, 누구든 알아보는 시그니처 디자인의 명품백 같은 물건들과 교집합 되는 속성이 있다. 몇만 원 정도를 주고 내 침실에 걸고자 하는 장식적으로 보기 좋은 적당한 크기의 그림을 사는 것과, 펄램 갤러리에서 컨템퍼러리 중국 작가의 추상화를 사는 것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얘기다. 그 점에서 나는 사치가 미술계의 시세 형성과 트레이딩 섭리에 대해 모르는 척하는 것이, 마치 '미래를 함께 일궈간다는 생각을 갖고 비전에 진정으로 동조되는 회사의 주식을 사라'는 투자 조언과 비슷하게 기만적으로 느껴진다.
아무튼 나는 아트 컬렉팅이라는 이름의 욕망의 형태랄지, 부르주아지의 자아실현이랄지, 그런 것에 대해 전혀 대해 부정적이지 않다. 오히려 긍정적인 편이고 데뷔란 것을 해야 음악방송에 나오는 아이돌을 볼 수 있는 것처럼, 그렇게 비싸게 작품을 사는 사람들이 있어야 내가 트레이시 에민이나 제니 사빌 같은 사람들의 작품을 접하고 즐길 수 있게 된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작품의 시세를 터무니없이 올려놓지 않으면 나 같은 필부들은 지구 반대편에 그런 작가가 살고 있는지조차 모르고 지나치기 십상일 테니 말이다. 그리고 나도 몇 억씩 부가가치 제품을 사는 일에 쓰며 다른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좋아하는 것을 하라' 같은 조언을 하는 계층의 사람이 되고 싶다. 염세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진심이다. 아직 나는 그런 모순을 잘 품어내기에는 너무 무산계급이고 나 자신의 기만에 의심을 갖지 않을 정도로 충분히 기득권이 아니다.
나는 제니 사빌의 그림을 갖고 싶기도 하지만 동시에 제니 사빌의 그림을 갖고 있는 사람이 되고 싶은 것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