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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od night and Feb 15. 2021

결국 환상일 수밖에 없다는 건 알지만-2

뉴욕 현대 미술관

내가 대학생 때까지만 해도 '논객'이란 존재들이 있었다. 그들이 하는 일은 주로 일간지의 사설이나 웹 공간에 게시되는 형태를 통해(이때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장문의 글을 읽으며 살았다) 사회, 정치적 현상들에 대해 인문학적 논리를 펼치기도 하고 사회학적 학파의 계보에 따른 주장을 하기도 하며 그런 글들을 기고하고 책으로 엮어서 돈을 버는 사람들이었다.


내가 신문방송학과를 다니고 있을 당시 시대의 석학, 예리한 지성으로 떠받들어지던 이들은 노엄 촘스키, 슬라보예 지젝, 그리고 진중권 같은 사람들이었다. 내가 경기도지사로 김문수란 정치인을 처음 알았기에 그의 과거 학생운동 시절을 알고 깜짝 놀랐던 것처럼, 지금 10대 후반 혹은 갓 대학생이 된 이들은 진중권이 한국에서 '미학'이란 단어를 대중화시킨 사람이자 동시대에서 가장 첨예한 주장을 하던 지성인이었단 것을 알면 아마 놀라 자빠질 것이다. 세월이란 참 웃긴 것이다. 그땐 정말 실제로 그랬다.


 나는 2012년에 뉴욕으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진중권의 <미학 오디세이>를 읽었는데 그것이 내 인생에 있어서 처음으로 미술사, 미학에 대한 접점이었다. 인간이 왜 항상 무언가를 아름답다고 정의하며 미의식을 추구하는지 그 이유에 대해 미술사적 관점에서 대략적으로 훑는 내용이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포스트모던 챕터는 이 날을 기점으로 이후 내 취향의 거의 모든 것을 결정했다고 봐도 무리가 아닌데, 이전까지 종교적 위엄이나 계급주의적 표상으로만 사용되던 예술에 반기를 든 모던시대의 '미친놈'들의 작품이 그렇게 멋져 보일 수가 없었다. 왜 그림을 그리는 데에 정해진 표현법을 따라야 하는지, 왜 귀족들의 인증을 받아야 예술가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한 반감부터 출발한 반항아들의 역사는 기성품 변기도 예술이라며 전시장에 갖다 두거나 알록달록한 세모 네모를 그리면서 아방가르드란 개념에 대해 설파하는 사람들의 출현까지 이르며 무한히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들을 토해냈다. 



그중 나에게 강력한 울림을 남긴 작가는 프란시스 베이컨이었는데 종교 제단화의 형식인 트립틱을 사용해 '아름답지 않은' 그림을 그린 점이 너무나 멋지게 보였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이게 사람인지 짐승인지 알 수 없는 괴상한 살 덩어리들이 원래는 숭고한 가치를 위엄 있게 가르치려 했던 종교미술의 틀 안에 담겨 있는 모습은, 일평생 어떤 예술적 혼이나 혁명 비슷한 것 근처에도 못 가본 20대 여성의 심금을 울렸다. 존 F. 케네디 공항으로 향하는 그 대한항공 에어버스 안에서 인류 사상 가장 위대한 예술가는 프란시스 베이컨이었다.


뉴욕 현대미술관(MoMA)은 메트로폴리탄 박물관보다 좀 더 내가 상상한 드라마 속 현대적 뉴욕에 가까웠다. 뉴욕의 상징과도 같은 피프스 애비뉴(5th Avenue)를 따라 빌딩 숲을 쭉 걸어 올라가다가 웨스트 51번가인지 53번가인지 앞에서 할랄 가이즈를 사 먹었다. 꽤 추운 겨울날이었는데 친구가 푸드트럭에서 음식을 사서 건물 계단 같은 데에 앉아 먹는 게 뉴욕 입성의 통과 의례 같은 거라고 했다. 일단 난생처음 먹어본 할랄 가이즈는 맛있었고 누가 봐도 관광객처럼 보였겠지만 어쨌든 미술관에 가기 전 푸드트럭에서 요기를 하는 게 대도시에 사는 어른의 일상처럼 느껴지긴 해서, 모마에 입장도 전에 기분이 들뜨기 시작했다. 


이때 당시에는 비행기에서 읽은 <미학 오디세이>를 제외하면 미술 자체에 대해 거의 잘 모르기도 했고 모마에 어떤 작품들이 전시돼 있는지 그다지 조사를 하지 않고 갔었는데 모네의 <수련> 같은 생각보다 유명한 작품들도 많았고 기품 있게 조성된 중정과 인테리어들이 세련된 현대contemporary의 감동을 충분히 전달해 주고 있었다. 그리고 정말 예상치 못하게, 여기서 프란시스 베이컨의 작품들을 실물로 보게 되었다. 실물이 주는 위압감이나 감동보다는(<초상화 연구 7번> 같은 작품은 생각보다 거대하긴 했다) 사진과 영상으로만 보던 연예인을 실제로 만난 느낌이었다. 그 대단하다던 그림이, 바로 이렇게 생겼구나? 이 곳에 이런 모습으로 걸려 있었구나? 그 위대한(그렇다고 책에서 읽은) 그림들을 이렇게 실제로 보러 올 수 있다니, 뭔가 거대한 미술사의 흐름에 발을 담그게 된 기분이었다.


당시의 스마트폰 화질로 최선을 다해 찍은 사진들이다. 이 때는 로렌스 와이너가 누군지도 몰랐다. 호퍼의 그림에 빠져 있을 때라 휘트니 뮤지엄도 가고 싶었지만...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줄을 이어, 사람이 없는 모습을 찍을 수 없던 잭슨 폴락의 그림




<미술관이라는 환상>에서 캐럴 던컨은 현대미술관이 젠더 의식을 어떻게 재 확산하는지에 대해 지적한다. 철저한 남성 주체의 시각에서 여성의 신체를 '현대미술의 소재'로서 어떻게 대상화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하며 이런 부분에서 모마는 자본주의 사회의 모든 비주얼을 잠식한 광고들과 비슷하다고 지적하는데, 이 주장은 95년에 쓰인 것이다. 그리고 현재 모마의 화두는 다양성이 되었다. 백인 남성 중심의 시각에서 벗어나(혹은 최소한 벗어나고자 한다는 노력이라도 보이고자) 3세계, 여성, 퀴어 등의 키워드를 가지고 큐레이션을 꾸려가고 있고 한국인들에게 익숙한 작가인 양혜규의 작품도 로비에 전시되는 등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변화들이 생기고 있다. 


이는 모마가 깨어있는 다양성의 첨병이라든가, 개념 있고 올바른 예술을 지향하는 단체로 재탄생했다든가 하는 것이 아니다. 어느 시대에든 '현대미술관'으로서 동시대의 시대정신을 담아내고자 하는 노력을 실패 없이 일궈가고 있다고 봐야 맞을 것이다. 그 동시대의 시대정신이 자본주의에 잉태된 남성우월주의든, 환경론과 결합한 젠더 무용론이든, 그 외 무엇이든 말이다. 당신이 지금 살아가고 있는 지구의 현주소에 대해 무언가 제대로 알고 싶다면 바로 모마로 직행하면 되는 것이다. 물론 지구의 현주소인데 왜 미국의 뉴욕으로 가야 하느냐- 같은 해결되지 않은 문제의식들이 남아 있긴 하지만, 어쨌든 그런 위계조차도 현재의 질서에 극명히 남아있는 것이긴 하니까. 뉴욕 현대미술관이란 존재는 메타적으로도 완벽한(?) 지표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니 내가 2012년에 베이컨의 그림 앞에서 느꼈던 '거대한 미술사의 흐름에 한 발 담그는' 기분이 영 틀리진 않았던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고 들락거리는 사람에게도 비언어적 직관으로 존재의 이유에 대해 설명할 수 있다니, 미술관이란 존재는 어디에 어떤 모양으로 존재해도 참 가지각색으로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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