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Good night and May 08. 2021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노매드랜드> 클로이 자오, <조우> 빌 비올라

2021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감독상을 시상하러 나온 봉준호는, 후보들에게 '영화란, 디렉팅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그 답을 소개했었다. 그 중 <미나리> 감독 정이삭은 "영화는 삶에 대한 응답이어야 한다. 그 반대는 성립하지 않는다.(후략)"이라고 답했다. 영화가 삶에 대한 응답이라면 삶은 질문이 된다. 삶이 던지는 질문들은 무엇일까? 그냥 살아기는 매 순간이 스스로 답해야 하는 물음표일지도 모르겠다.


<노매드랜드>는 정이삭의 이 코멘트를 그대로 옮겨 영화로 만든듯한 108분간의 영상이다. 주인공 펀과 그녀가 마주치는 길 위의 사람들, 그리고 광활하고 아름답고 때로는 황량하고 잔혹하기까지 한 자연 환경의 모습이 계속해서 펼쳐진다. 처음에는 밴에서 살며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사는 주인공 펀을 통해 한국영화 <소공녀>처럼 집을 소유하지 않는 어떤 삶의 방식에 대해 조명하는 것인지, 혹은 집이 계급의 상징인 것에 대한 이야기인지 싶었지만 흘러가는 펀의 시간을 지켜보다 보면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의 생애 그 자체에 대한 내용이라는 걸 알게 된다. 사람들은 만나고 헤어지고 이야기를 나눈다. 그들로 인해 인생의 여로가 조금씩 바뀌기도 하지만 어쨌든 계속해서 길 위에서 움직이고 있음은 변함이 없다.


<노매드랜드>에서 펀은 계속해서 머물 곳과 할 일을 찾아 이동하며 1년을 보낸다. 펀이 머무는 공간들이 계속해서 바뀌는 사이 어느샌가 시간은 흘러가 있다. 그 단어들이 정확히 무엇을 지칭하는지에 대한 합의와는 별개로, 어쨌든 인간을 포함해 우리가 세상이라고 부르는 것은 "현재의 시간"과 "3차원의 공간"이 교차하는 지점에 존재하고 있다. "나"의 존재는 그 시공간이 분절되어 여러 개로 존재하든 한 개의 연속성으로 존재하든, 어쨌든 바로 이 시간 이 곳에 있는 존재란 뜻이다.


<노매드랜드> 속 인생에는 인간과 인간의 조우 혹은 인간과 공간의 조우같은 여러가지 접점들이 등장한다. 펀의 남편과 언니, 그리고 길 위에서 만난 친구들 모두, 만남과 헤어짐의 때가 있다. 원치 않는 헤어짐은 상실의 슬픔을 안겨주지만 펀과 친구들은 그 슬픔을 껴안고 계속해서 살아가는 법을 배우고자 애를 쓴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그러므로 영원한 상실도 없다. 시간이 흐르고 계속해서 움직인 우리는 언젠가 길 위에서 다시 마주칠 것이다. <노매드랜드>는 삶에 대한 이야기를 끝마치며 우리에게 이렇게 인사한다. “지나가다 또 봅시다(See you down the road).”


https://www.youtube.com/watch?v=w3VfWLlkuRI&t=68s

빌 비올라 인터뷰


부산 시립미술관에서 열렸던 빌 비올라의 <조우> 전시도 이와 비슷한 시간의 흐름이란 궤를 걷는다. 빌 비올라의 작품들은 주로 시간성의 틀 안에서 전개된다. <인사The Greeting>과 <놀라움의 5중주The Quintet of Astonished> 같은 작품들은 고정된 프레임 안에서 움직이는 인물들을 슬로우 모션으로 재현하며 그들의 제스쳐, 표정, 머리카락이나 옷 같은 텍스쳐의 변화 등에 초점을 맞춘다. <인사>에는 세 명의 인물이 등장하는데 이들이 차례로 서로 마주치며 인사를 나누고 가벼운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슬로우 모션으로 펼쳐진다. 가볍게 불어오는 저녁의 산들바람을 연상시키는 공기의 흐름이, 인물들이 입고 있는 휴양지에 적합할 듯한 밝은 색감과 가벼운 두께감의 옷들을 쉼없이 흔든다. 원래의 시간 대로였다면 피부에 상쾌하게 와닿는것처럼 느껴졌을 산들바람의 모습이 슬로우 모션으로 재현되면서 훨씬 더 무겁고 거대한 폭풍처럼 보여지며 변화하는 인물들의 표정이 보는 이로 하여금 걱정과 불안에 휩싸이도록 만든다.

 

<대홍수The Deluge>를 포함해 5개의 영상의 설치 작업으로 이루어진 <우리는 날마다 앞으로 나아간다>에서 이런 방식의 효과는 극대화 된다. 비슷하게 삶의 시간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빌 비올라의 작품들이 <노매드랜드>와 가장 다른 점은 바로 이 부분이다. 변하지 않는 공간에 포커스를 고정시키고 그 안에서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죽음을 맞이하여 떠나가는 순간이기도 하고 끊임없이 걸어가는 무수한 사람들의 발자국이 새겨진 숲이기도 하다. 빌 비올라는 흘러가는 시간을 지독할 정도로 응시하며 그 시간의 흐름과 함께 변화하는 인간의 모습을 묘사한다. 그 영상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우리가 어디에 존재하든 시간은 계속해서 흘러간다는 진리가 피부로 느껴진다. 때로는 한 자리에 가만히 머물러 정체된 것처럼 느껴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 우리는 매순간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1초 뒤의 나는 1초 전의 나와 완전히 동일할 수 없다. 1시간도 0.1초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어디론가 계속해서 가고 있다. 목적지가 정해져 있을 때도 있지만 정처없이 그냥 흘러갈 때도 있다. 어느 쪽이든 인생이 아닌 것은 없다.

매거진의 이전글 잃어버린 노스탤지어를 찾아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