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블(넷플릭스) <제시카 존스>
제시카 존스는 도심에 위치한 허름한 아파트에 산다. 그녀의 집에는 책상과 침대, 랩탑 컴퓨터, 그리고 위스키 병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반투명 유리를 달고 탐정 사무소 간판을 내건 현관문은 멀쩡한 제 모습으로 있는 시간이 거의 없다. 집 안도 곳곳이 부서져 있고 총알 자국이 박혀 있다. 종종 제시카를 찾아오는 불청객들의 흔적이다. 종이 박스로 대충 막아놓은 부서진 문은 원래 현관문의 역할인 보안의 기능은 전혀 없고, 형식적으로 집 밖과 안을 나눌 뿐이다. 제시카 존스는 옷도 거의 갈아입지 않는다. 다른 영웅들처럼 낯간지러운 ‘전투복’은 당연히 입지 않는다. 항상 후줄근한 티셔츠에 청바지, 그리고 추울 때 입는 라이더 재킷과 머플러가 전부다. 그녀가 엉망인 집에 살며 늘 똑같은 차림으로 외출할 수 있는 이유는 간단하다. 제시카 존스는 강하다.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고 집을 안전하고 아늑하게 꾸밀 필요도 없다. 제시카는 초능력자고, 그녀는 맨손으로 자동차를 들 수 있으며 수퍼 점프로 건물 3–4층 높이까지 어렵지 않게 뛰어오를 수 있다.
제시카 존스는 세상을 구하지 않는다. 그녀는 영웅이 되길 싫어한다. 다른 헐리우드 히어로 무비에 자주 등장하는, 고뇌하는 영웅의 서사 — 자신에게 초능력이 있기 때문에 이것을 세상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는 소명의식, 불의에 맞서야 한다는 정의감에 대한 고민 등 — 은 제시카와 아무 관련이 없다(오히려 그런 것을 혐오하는 편인 듯). 그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을 덮친 불행 가운데에 살아남는 것이었다. 세상 일에 관심이 없는 제시카 존스는 그렇다면 언제 자신의 능력을 사용할까?
그녀가 남을 돕는 유일한 이유는, 누군가의 인생이 자신의 눈 앞에서 망가지는 것을 보고싶지 않아서다. 자신이 비극을 직접 겪어 보았기에 더 이상은 누군가가 그런 고통을 당하지 않길 바라는 인간적 연민만이 그녀의 유일한 동기다. 다른 이들은 더 이상 억울하게 가족을 잃지 않기를, 자신보다 강한 이에게 억압 당해 스스로를 잃어버리지 않기를 바란다. 그녀가 몇 년간 자신을 괴롭히던 퍼플맨을 피해 다니다가 결국 그를 끝장 내기로 결심하는 이유 또한 같은 맥락이다. 그녀의 동기에는 ‘이 도시를 퍼플맨에게서 구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아닌, 그가 더 이상 다른 이들을 괴롭히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책임감과 약간의 개인적 복수심이 섞여 있다.
자신에게 도움을 청하는 사람들을 대부분 외면하지 못 하지만, 그런 제시카 존스에게 가장 높은 우선 순위는 친구 트리시다. 트리시는 히어로 무비의 사이드킥 역할이기도 한데, 현재 제시카에게 있어 유일하게 가장 가족에 가까운 존재다. 트리시가 제시카에게 중요한 이유는 그녀가 제시카에게 유일한 존재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제시카 또한 트리시에게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대상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서로 애인이 될 일도 절대 없는 이 두 여성은 서로를 위해 목숨도 내놓을 수 있는 인생의 동반자다.
이런 점들에서 제시카 존스는 여주인공을 앞세운 히어로 무비로서 여러가지 유의미한 설정과 플롯을 보여준다. 세상을 구하기 위해 분연히 떨치고 일어선 초능력자도 아닌, 모성애 혹은 로맨스를 품은 것도 아닌, 위스키에 절어 사는 우울한 히로인 제시카 존스. 모든 것을 잃은 제시카는 자신의 손 안에 얼마 남지 않은 것들을 지키기 위해 애쓴다. 그것들은 몇 명 없는 그녀의 친구들이기도 하고, 최후의 순간까지 제시카 존스가 잃고 싶지 않은 인간다움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