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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od night and Jul 03. 2022

여성의 문제

뉴욕 맨해튼, 2022년 6월 27일 월요일

큰일났다. 대부분의 미술관과 갤러리들이 월, 화, 수요일에 쉰다. 나는 토요일부터 수요일까지 이곳에 있는데, 도시 안의 모든 미술관을 다 방문하겠단 포부를 갖고 왔는데, 할일이 없어졌다. 미리 스케줄을 알아봤음 좋았겠지만 짐도 겨우 싸 왔는데 그럴 여유는 없었다. 허망함을 잠재우기 위해 어쨌든 뉴욕에 오긴 왔고, 아무것도 안해도 재밌다고 자기 최면을 거는 중. 


여기서 만나기로 한 일행은 나만큼 아무 생각이 없어서 둘이서 여기갈까 저기갈까, 괜히 검색창만 열었다 닫았다 한다. 어쨌든 다시 와보니까 10년 전에 입력된 내 기억력이 엄청나게 정확한 걸 확인했고, 그래서 굳이 기억에 남을 기념 사진을 남기거나 빡빡한 스케줄을 짧은 시간 안에 소화해 내지 않아도 된단 안도감이 들었다. 언젠가 여기에 다시 올 수 있을 것이고 그 때 내가 기억해두었던 것들을 다시 해 보면 된다는 생각에. 그리고 뉴욕은 서울만큼 빨리 변하지도 않는다. 정말 많은 것들이 10년 전과 똑같이 그대로 제자리에 있어서 나를 놀래켰다. 도대체 서울은 얼마나 미친 도시인가? 


갑자기 오전부터 비가 억수로 쏟아졌다. 이러다 족저근막염에 걸릴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던 차이기도 했고, 비도 오는 김에 조금 쉬엄쉬엄 다녀야겠다. 점심 쯤 일행을 만나 구겐하임 구경부터 하기로 했다. 지하철에서 헤매는 친구를 기다리면서 매그놀리아 컵케익 가게에 들어갔다. 도대체 왜 미국은 건물들에서 그런 냄새가 나는 거지? 가게 안에서 컵케익을 먹으며 기다리려고 했는데 도저히 냄새를 견딜 수가 없어서 비에 젖어 축축한 바깥으로 나와 개미떼의 공격을 막아내며 바나나 푸딩을 뜯었다. 미국에 와서 제일 괴로웠던 것은 다름아닌 냄새. 모든 장소에서 온갖 불쾌한 냄새가 다 난다. 시애틀, 특히 다운타운에서는 찌린내와 쑥뜸 냄새가 진동을 했다. 쑥뜸 냄새는 당연히 대마, 찌린내는 노숙자들이 온통 길거리에 오줌을 싸놨기 때문이었다. 


뉴욕도 길거리에서 대마 냄새가 많이 나긴 하는데 맨하탄 대마 냄새는 역겹다. 그와 비슷한 악취는 맡아본 적이 없어 묘사가 어렵다. 이 냄새만 맡으면 속이 미식거리고 진짜 불쾌한데 도대체 이런 냄새를 왜 돈 주고 사서 피우는지 모르겠다. 시애틀에서 갔던 가라오케에서 '50년 동안 한 번도 청소하지 않은 개집 냄새가 난다'고 생각했는데 그 급으로 불쾌한 냄새였다. 지금 다시 머릿속에 상상만 해도 토할 것 같다. 


친구를 만나 하나 남은 컵케익을 건넨 후, 리프트로 부른 도요타 캠리에 올라탔다. 장대비를 뚫고 도착한 구겐하임의 입장 관리인이 내 티셔츠를 보고 "그래서 너의 '롱 베케이션' 동안 뭘 할 거니?"라고 물었다. 실제로 계속 아무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잘 모르겠는데.. 구겐하임에 가겠지?" 라고 대답했다. 중년의 남성 직원은 왜 귀한 휴가 동안 그런 걸 하느냐는 듯한 표정으로, 인상 좋은 검은 얼굴을 좌우로 휘저었다. 충분히 이해는 된다. 누가 휴가를 내고 센터필드 건물에 놀러온다 하면 나도 그렇게 고개를 젓겠지. 


매표소 창구에 앉아있는 어린 백인 여자는 어깨에 트와이스 뱃지를 달고 있었다. 그게 트와이스 팬 뱃지인지 알게된건, 그 직원이 나한테 어디서 왔느냐고 묻고 내가 한국에서 왔다고 하자 자기가 트와이스의 팬이라고 말하면서 그 뱃지를 가리켰기 때문이다. 다음 주에 뉴욕에서 하는 케이콘K-con에 트와이스가 온다고 한다. 내가 어떤 노랠 제일 좋아하냐 물으니 T.T 라고 대답했다. "나도 그 노래 좋아해, 정말 훌륭한 노래야"라고 대답하며 매표소를 벗어났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트와이스 노래는 Dance the night away다. 지금도 듣는 중. 


구겐하임에서는 세실리아 비큐냐((Cecilia Vicuña) 기획전이 열리고 있었다. 내가 현대미술에서 구태의연함을 느낀다고 이미 여러 번 얘기했던 것 같은데, 특히 현대 미술이 페미니즘과 결합하면 더욱 그런 것 같다. 사실 정말 열받는 점은 이런 전시가 뻔해질 때까지 사회적으로나 시스템적으로 변한 게 없다는 거다. 여성의 젠더적 자의식을 주제로, 신체를 해체 하는 비주얼은 세실리아 비큐나를 포함한 정말 여러 페미니즘 작가들이 반세기 가까이 해 온 일이다. 그런데 로 대 웨이드 판결이 뒤집힌 것이 바로 이번 주 아니던가. 너무 오랫동안 열이 받아 있으면 가끔은 모든 진지함을 벗어 버리고, 부적절하고 농담이나 하며 웃고 싶을 때가 있다. 진지하게 성찰했던 문제들이 짜증과 신경질이 되었다. 우리는 아직도 해결책을 찾지 못한 채, 안전한 화이트 큐브 안에서 추상적 상징으로 전환된 조형물들을 구경 하고 있다. 


이런 전시들을 보며 제자리 걸음 하고 있는 여권에 대해 생각하기 보다는 그냥 친구랑 웃고 떠들며 한국 민속촌에 온 사람처럼 작품 위에 머리를 들이밀고 사진을 찍는 것이 훨씬 마음이 편했다. 구겐하임에서 소장하고 있는 칸딘스키의 작품들도 드디어 제대로 감상하게 되었는데, 러시안 아방가르드도 좋아한지 너무 오래돼 약간 옛날에 팬클럽이었던 오래된 아이돌을 보는 듯한-정겹지만 감동적이진 않은-느낌으로 빠르게 지나갔다. 


일요일에 못 먹은 사이공 쉑의 쌀국수를 늦은 점심으로 기어코 먹었다. 한국 사람들이 미국에 일주일 이상 머무르면 동남아 혹은 중국 음식만 먹게 된다. 천하일품이라는 스테이크도 프렌치 레스토랑도 관심이 없어진다. 국물 한 사발을 후루룩 마시고 소호 근처와 NYU 부근 동네를 돌아 다니다가 각자 저녁 약속을 가기 위해 친구와 헤어졌다. 시간이 남아 동네 책방에 들어갔다. 동네 책방인 줄 알았던 맥날리 잭슨은 소장하고 있는 책 종류와 권수로 따지면 한국에서는 영풍문고 정도는 되는 것 같았다. '독립 서점'이라 쓰여 있어 들어온건데. 문득, 이렇게 국내 독서 인구가 적으면 몇세기 내에 한국어는 소멸하는거 아닌가,란 걱정이 들었다. 이내 그래도 어쩔 수 없지란 결론을 내리며.


저녁에는 그리스 음식점에서 J님이 소개한 엠마님을 만났다. 뉴욕에 꽤 오랫동안 거주하며 디자이너로 일해 온 엠마님의 이야기에는 배울 점과 생각해 볼 점이 많았다. 1세계에서 아시안 여성으로, 커리어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자리잡은 그녀의 이야기는 당연히 <인간극장>일 수 밖에 없겠지만. 아무튼 나는 거의 반 어거지로 엠마님께 '당신은 이제 우리 커뮤니티의 일원'이란 개념을 주입시켰다. 나는 이상한 데에서 내가 어른이 된 것을 실감한다. 엠마님을 만난 것처럼 나의 사회가 넓어지고 느슨하나마 고리를 걸 수 있는 연결점을 찾아 사람들과 서로 연결되는 순간 같은 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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