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맨해튼, 2022년 6월 28일 화요일
오전에 랄프스Ralph’s 카페에 가서 미국에 들고 온 데이빗 포스터 월리스 책을 읽었다. 오늘은 날씨가 아주 맑게 개었다. 부스러기를 찾아 옆을 맴도는 참새들을 못 본척 하며 야외 테이블에 앉아 정수리에 햇볕을 쬐었다. 도넛과 커피를 시켜놓고 데이빗 린치에 관한 챕터를 읽었다. 그 중에서도 월리스는 그 당시에 갓 개봉한 <로스트 하이웨이>를 집중 조명 했다. <로스트 하이웨이>는 아직 본 적이 없다. <트윈 픽스>나 <블루 벨벳>처럼 왓챠에 올라와 있는 영화들은 다 봤지만 <로스트 하이웨이>는 없었던 것 같은데. 점심 식사 시간에 맞춰 만난 A가, 친구가 링컨센터를 구경하라고 추천 해줬다면서 마침 우리가 헬스키친에서 점심을 먹고 있으니, 앞의 링컨센터에 가서 호러 영화를 보겠느냐고 물었다. 링컨센터의 영화 시간표를 보니 마침 <로스트 하이웨이>도 있었다. 하지만 지적 허영심에서 비롯된 호기심에 3시간짜리 영화를 보기엔, 남은 시간이 별로 없는(이틀!) 관광객이었고 컨디션 상황상 어두운 극장 안에 2시간 넘게 앉아 있으면 골아떨어질 것이 분명했다.
뉴욕에는 이런 우연이 많았다. 월리스의 책을 읽자마자 <로스트 하이웨이>를 링컨 센터에서 볼 수 있던 것처럼, 내가 알고 있는 문화의 소스들이 한 자리에 모여 있었다. 나를 잠식한 문화의 대부분이 미국이라는 나라의 가장 큰 도시, 이 뉴욕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뜻이기도. 한 친구는 이곳이 '마르지 않는 영감의 도시'라고 했다. 어쩌면 세계의 질서가 개편 되지 않는 한 지구인의 문화적 영감은 뉴욕에서밖에 못 나오는 걸지도 몰라.
오후에는 센트럴파크에 가서 A와 함께 르뱅 쿠키를 나눠 먹으며 호수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진짜로 발바닥이 터질 것처럼 아팠다. 출장 일정부터 함께 한 우리는 하루에 2만보씩 걸은지 2주 째, 모든 의욕을 잃었다. 차라리 잘 됐다, 휴가니까 아무것도 하지 말자, 라고 서로를 향해 계속 중얼거렸다. 하지만 입으로 내뱉는 말과 다르게 A와 내 맘 속에서는 끊임없이 한국인의 얼이, '여기까지 와서 게으름이나 피울거냐'며 채찍을 때렸다. 그래도 유명하다는 쿠키도 사왔으니 뭐라도 한 거 아닌가 싶어, 센트럴파크에 제법 오래 앉아 있었다. 센트럴 파크 호수엔 제주도 쇠소깍처럼 나룻배를 타는 사람이 많았다. 호수가 꽤 큰데, 구명조끼들도 안 입고 열심히 노를 저었다. 우리 발치에는 목을 빼고 잠을 자는 자라들이 있었다. 물릴까봐 조금 무서웠는데 옆 자리의 게이 커플은 신경도 안 쓰고 평편한 돌 위에 서로를 껴안고 누워 푸지게 낮잠에 빠져 있었다. 미국인들의 안전 감각에 잠시 현기증이 느껴졌다.
우리는 차마 비위생적인 공공장소에서 뒤집어지게 잘 용기가 나지 않아, 궁여지책으로 차를 잡아 타고 그 안에서 쉬면서 다른 목적지로 이동하자는 계획을 세웠다. 맨해튼의 울퉁불퉁한 아스팔트 길을 달리는 바퀴의 움직임에 맞춰, 잠에 빠진 우리의 머리는 끊임없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A는 흰 바지를 입고 마시던 테이크아웃 커피를 가랑이에 끼운 채 잠들었는데 내려보니 바지에 커피가 좀 묻어 있었다. A가 나에게 '생리혈 묻은 것 같냐'고 물어서 나는 솔직하게 '커피 묻은 데가 고추 있는 사람이 오줌 지린 위치 같긴하다'고 대답했다. A는 욕을 읊조리며 가까운 애플 스토어 화장실에 들어갔고 커피 자국을 지우느라 씨름 하는지 한참을 나오지 않았다.
결국 커피 자국을 해결하지 못한 A는 새 바지가 필요했고 이렇게 소호에서의 신나는 쇼핑이 시작되었다. 랄프 로렌을 시작으로 우리는 소호에 있는 거의 모든 브랜드의 가게를 한 번씩 방문했다. 쇼핑에 너무 몰입해버린 나머지, 저녁에 시간이 남을 거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촉박해져 예약해 둔 고담Gotham 코메디 클럽은 가지 못했다. 나중에 알고보니 예약이 제대로 접수 되지도 않았었더라. 발바닥을 끊임없이 공격하는 격렬한 통증이 '될 대로 돼라' 정신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도저희 미국 대중 식당이라 해야할지, 서양 음식이랄지, 암튼 '미국 밥'을 먹을 수가 없는 상태가 된 우리는 애타게 중국 음식점을 찾았다. 처음엔 맛집이라 추천 받은 Hop Kee에 가려 했다. 그런데 아뿔싸, 그곳으로 걸어가는 길에 훠궈집을 발견해 버리고 말았다. 어떻게 훠궈를 그냥 지나칠 수 있단 말인가? Da Long Yi Hot Pot은 맨해튼 다운타운 최고의 맛집이다. 우리는 아이패드에서 정신없이 눈에 보이는 대로 메뉴를 쓸어담았고 매운 혓바닥을 달래기 위한 수박주스까지 주문했다. 내 기준 훠궈에 쓴 1인당 가격으로 최고치를 갱신했다. 저녁 한 끼 먹는데 거의 두 시간 넘게 썼다. 뜨끈한 홍탕에 담근 고기와 야채를 실컷 먹고 나오니 망고 빙수나 버블티 같은 남방 중국의 디저트가 간절해졌다.
디저트를 찾아 차이나타운을 계속 돌아다녔지만 아홉 시밖에 안 됐는데도 다 문을 닫았거나 현금만 받는 가게들 뿐이었다. 우리는 한국에서 온 사람들답게 단 1달러도 현금을 소지하고 있지 않았다. 불꺼진 차이나타운은 분위기가 좀 무서웠다. 중간중간 힙스터들이 파티를 하는 바도 열려 있고 공원 구석에서 중년의 아시안들이 태극권을 하고 있기도 했지만, 폐허같은 골목 분위기가 공포감을 자아냈다. A가 갑자기 '친구가 밤에 차이나타운 같은 데 돌아다니지 말랬는데'라며 불안한 기색을 내비쳤다. 그 얘길 지금 하면 어떡하냐고 호들갑을 떨며, 우리는 가장 밝게 불이 밝혀진 탁구장 통유리 앞에 서서 잽싸게 각자 택시를 잡아 타고 헤어졌다. 생각해 보니 제대로 한 일이 없는 하루였지만 훠궈 하나로 이 날은 완벽하게 기억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