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이름은 희주다(사실 아니다. 이건 엄마의 아명이고 엄마의 실명을 얘기하면 몇몇 사람의 신상정보가 드러나는 내용이라 그냥 이름을 바꿔 썼다). 우리 엄마는 가부장적이고 보수적인 사상을 가지고 어린 딸을 교육했고 지금도 마저 다 떨치지 못한 그 옛 사상의 잔재들로 종종 세상을 재단하곤 한다. 하지만 가정 바깥에서의 그녀가, 얼마나 자기 멋대로였는지, 너무 멋대로여서 전혀 의도와 상관없이 진보적인(혹은 반항적으로) 태도를 견지하게 되었다는 것은, 같이 사회 생활을 한 사람들이 아니고서는 잘 모를 것이다.
대학을 갓 졸업했던 희주 씨는, 지금은 세가 기울었지만 당시 유신-군사 정부 시절 잘나가던 대기업 A의 회장 비서실에 취직하게 되었다. 면접에 희주 씨를 추천해 준 것은 그녀의 대학 교수님 중 한 사람이었다. 희주 씨는 유학 경험이 없었지만 영어를 곧잘 했고 늘 깔끔하게 손질 된 옷을 입고 다녔다. 희주 씨의 어머니가 청주에서 서울까지 바지런히 왔다 갔다 하며 명동에 있는 의상실에서 희주 씨의 옷을 해 입혔고, 필요할 때는 자취방에 식모까지 들이며 살림을 살뜰하게 보살핀 덕이었다. A 기업의 회장은 맨손으로 월남해 자수성가한 재벌이었지만 학벌 컴플렉스가 있었다. 아니, 재벌이 되고서 엘리트들과 어울리다 보니 학벌 컴플렉스가 생긴 것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는 직원을 채용할 때 딱 두 가지 기준을 적용했다. 학벌과 관상. A 회장은 자기와 친한 서울 시내 대학 교수들에게 임원 비서를 채용할테니, 여학생들 중 ㅣ후보들을 뽑아 보내달라는 부탁을 했다. '상위 N%'가 다니는 신촌의 대학에 다니던 희주 씨는 그렇게 교수님의 추천을 받아 A 기업 비서 면접을 보러 가게 되었다.
면접은 단 한 번, 하루동안 치뤄졌고 면접 대기실은 서울대, 연대, 이대 등에서 교수님들의 추천을 받아 온 20대 여성들로 바글바글 했다. 몇 시간을 앉아 하염없이 기다려야 했던 그녀들은 서로 수다를 떨기 시작했고, 그것마저 지겨워졌을 때 누군가가 "우리 2부로 노래 부릅시다"라고 제안했다. 그렇게 면접 대기장에서 돌림노래를 부르며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앞서 면접을 끝내고 온 사람이 '예기치 못하게 영어로 자기 소개 하라는 질문 받아서 면접 다 망쳤다'고 투덜대는 이야기를 했고, 희주 씨는 와중에 그 이야기를 귀담아 듣고 속으로 영어 자기소개를 준비했다. 면접장에 들어가자 A 회장과 계열사 사장들이 쭉 앉아 있었다. 여러 질문을 하다가 사장 중 한명이 희주 씨에게 영어로 자기 소개를 해보라고 시켰다. 희주 씨는 아까 면접 대기장에서 준비한 문장을 유창하게 쭉 읊었다. 희주 씨의 영어 자기소개가 끝나자 A 회장은 "크..."라고 말하며 눈을 지그시 감고 엄지 손가락을 치켜 든 다음 위 아래로 흔들었다. 희주 씨는 그렇게 A 기업 회장 비서가 되었다.
계열사에 제과회사가 있었던 A 기업의 회장실에는 종종 공정 라인에서 갓 빼 온 비스킷들이 한 상자씩 들어왔다. 포장된 비닐 봉지 속이 아닌, 온기가 고스란히 남은 상자 속 비스킷의 맛을 본 희주 씨는, 매일 아침 생산라인에 전화를 걸어 비스킷을 가져다 달라고 요청했고 다른 임원 비서들과 나눠 먹었다. 희주 씨와 같이 면접 대기장에서 돌림노래를 부르던 사람 중 몇명은 계열사 사장들의 비서로 일하게 되었다. 회장 비서실에 비스킷 상자가 도착하면 희주 씨는 각각 임원 비서실에 전화를 걸어 그 사실을 알렸고, 그녀들은 아침을 먹으러 모여들었다. 회장과 사장들은 회사에 정해진 시간에 매일 출근하지 않았다. 며칠에 한번, 불규칙한 시간에만 회사에 오는 그들이 없는 모든 순간이 자유시간이었다. 그녀들은 비어있는 회장실에 잠입해 비스킷을 먹고 만족스럽게 입가에 묻은 부스러기들을 털며 나와 자기 자리로 돌아가곤 했다. 그들의 아침 식사는, 회장이 출근하지 않는 날에도 비서실에서 아침마다 비스킷을 요청한다는 것을 알게된 전화 교환원(공장에 전화를 걸기 위해서는 교환원이 전화를 연결해 주어야했다)의 일갈에 의해 종료 됐다. 매일 아침 일정 시간에 비서실에서 걸려오는 전화를 어느 순간부터 그 교환원은 받지 않았다. 희주 씨는 교환실에 컴플레인을 제기했고, 그가 "그 때가 가장 바쁜 시간인데 회장 비서실에서 걸려 온 전화라 최우선순위로 응대하던 겁니다. 정말로 급한 일 아니면 그 시간에 전화하지 마세요."라는 대답을 듣고서야 전화 교환원의 업무가 얼마나 바쁜지를 알게 됐다. 비스킷을 못 먹게 돼 가장 아쉬워한 건 안양에서 꼭두새벽에 일어나 공복으로 출근하던 다른 사장실의 비서였지만.
비스킷이 없어도 비서들은 상사가 없는 시간에 방 안에 모여 수다를 떨기도 하고 음악을 틀어놓고 춤을 추기도 했다. 비서들이 없을 때면 그 방엔 A 회장의 딸들이 있었다. 딸들과 사위들은 A 회장이 준 사내 직위를 열심히 수행하고 있음을 전시하려 회장실을 자주 드나들었다. 둘째 딸은 당시 막 맡은 구매실 업무를 나름 충실히 이행하기 위해 관련 자격증 공부를 했는데, 한자를 몰라서 못하겠다고 울상을 지어 희주 씨는 비서실에서 그녀에게 한자 병음을 직접 써주기도 했었다. 그렇게 친해진 자녀들도 A 회장이 없을 때는 회장실에 들러 희주 씨와 수다를 떨기도 했고 회장실 옆의 운동방에 들어가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어느 날은 그 둘째가 회장실 안에서 그녀를 불러 들어가 보니, A 회장의 관상책을 펴놓고 무언가를 손가락을 가리키고 있었다. "야, 이거 지금 우리 구매부장하고 너무 똑같이 생기지 않았니? 아버지가 이거 보고 뽑았나봐."라며 배를 잡고 웃었다.
희주 씨는 그렇게 몇년 간 회사 생활을 하다가 너무 배우는 것이 없다는 생각에 '대학원에 진학하겠다'고 말하고 A 기업을 그만 두었다. 실제로 대학원에 가진 않았지만.
그 후에도 외국계 기업에서 일한 경력이 있는 희주 씨는, 결혼하고 몇년 간 가정주부로 살았음에도 다시 어렵지 않게 일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닷컴'기업, 헤드헌팅 같은 단어들이 화이트칼라들의 화두였던 시절 희주 씨는 삼성역에 사무실이 있는 헤드헌팅 회사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희주 씨는 말솜씨가 좋아서 사람을 구슬리는 재주가 뛰어났고 중간에서 협상을 잘했다. 희주 씨는 입사한지 얼마 안돼 회사의 큰 딜을 혼자 모두 클로징 하게 되었다. 처음에 그녀가 대학 동문이고 동향 출신이라는, 단순한 네포티즘으로 채용했던 사장은, 이제는 희주 씨 없이는 회사가 돌아가지 않는다고 믿게 되었다.
희주 씨는 가부장적인 가치관을 갖고 있었고 그걸 자랑스러워하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집에 어린 아이들을 두고 밖에 나와 일을 하고 있는 자신이 여성으로서 부끄러웠다. 대출 이자만 다 갚고 나면 직장을 그만둘 생각이었는데, 가계 형편이 조금 나아지는 듯 하자마자 "집에서 애들 키우고 싶다"며 회사를 그만두었다. 사장은 연봉도 올려주고 직급도 이사로 승진도 시켜주겠다며 회유했고, 가사도우미를 고용할 돈을 다달이 현금으로 따로 주겠다고까지 했다. 노조란 단어가 흔하지도 않았던 시절 그런 개념 없이도 그녀는 사측과 협상을 통해 육아 수당에 대한 사내 복지를 쟁취한 것이나 다름 없었고 희주 씨는 큰 아이(나)가 초등학생일 때 다시 그 회사에 출근하기 시작했다.
내 기억 속 엄마는 9시 전에 출근하는 법이 없었다. 늘 자기가 늦어서 서둘러 준비하고 나가야 하니 너희도 빨리 준비하라며 부산스럽게 움직이고는 있었는데, 그렇게 부산을 떨고서는 일찍 나가는 모습은 본적이 없었다. 가끔은 집에서 10시까지도 안 나갈 때도 있었다. 이유는 늘 있었다. 빨래를 널어야 해서, 아침 설거지를 해야해서, 등등... 그렇게 늦게 출근 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오전 동안에는 이사실에 아무 콜도 넣지 말라고 지시하고 점심 시간까지 신문이나 책을 읽었다고 한다. 가끔 사장이 잔소리 할 때마다 엄마는 "나와 달라고 사정해서 다니는 건데 마음에 안 들면 나 잘라라, 매일 지각하고 점심 시간에도 2시까지 백화점에서 쇼핑하다 오는 직원을 왜 데리고 있냐"라고 강짜를 놓았고 그럴 때마다 사장은 소리를 지를 수도 욕을 할 수도 없어 붉으락푸르락 해진 얼굴로 참고 있었다 한다.
여기까지 이야기를 듣자 혼란스러웠다. '자기는 저렇게 제멋대로 사회 생활을 해놓고 나는 그렇게 엄격하게 키웠단 말이야?'란 생각을 하며 고개를 숙이고 밥숟갈을 놀릴 뿐이었다.
본인이 원한다면 어떤 방식으로든 사회에서 자리를 일궈갈 수 있었던 사람이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굳이 가정주부가 되었고 그걸 가장 자랑스러워 한다는 점. 근무태도나 능력에 대한 상사의 평가보다 '엄마는 요리를 못한다'는 자식의 피드백을 훨씬 더 불경스럽게 여기는 사고방식. 다른 딸들이 구조적 차별 속에 가족의 지원자 역할만 해온 엄마들을 안쓰럽게 여기고 거기서 삶의 교훈을 생각할 때, 나는 어떤 지점에 서 있는지 모르겠단 생각을 했다. 이제는 그냥 엄마는 자기 하고 싶은대로 하고 사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점이 외려 엄마를 존중(어떤 의미론 존경스럽기도 하다)하게 하고 나 또한 그런 방식으로 존중받아야 한단 생각을 더 견고히 해주는 것 같다. 꼭 안쓰럽고 애틋한 것만이 사랑은 아니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