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보듯 내 안의 나를 본다
1945년에 처음 출간되어 현재까지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책이다. 부부작가의 콜라보레이션이 빛난다. 아내 Ruth Krauss가 글을 썼고 남편 Crockett Johnson이 그림을 그렸다. 가지고 있는 책은 60주년 기념판 페이퍼백, 손에 쏙 들어오는 아담한 크기다. A4용지 반접 정도나 될까? 작고 몇 페이지 되지 않는 책이지만 담겨 있는 이야기는 그보다 깊다.
표지에서 아이가 빨간 씨앗을 떨어뜨리고 있다.
엄마가 말한다.
싹이 날 것 같지가 않구나.
아빠와 형도 차례로 다가와 엄마와 같은 말을 한다. 싹이 날 것 같지 않다고. 그러나 이 아이는 날마다 잡초를 뽑고 물을 준다.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는 걸까. 무심하게도 당근 씨앗을 떨어뜨린 그 자리, 팻말을 꽂은 곳에서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
가족 모두가 다가와 한두 번도 아니고 '계속' (kept saying) 너의 씨앗 키우기는 실패라고 이야기한다. 이제 그만 포기해야 하는 걸까. 아니, 아이는 하던 대로 날마다 잡초를 뽑고 물을 준다. 그러던 어느 날, 땅에서 보란 듯이 싹이 올라오고 순식간에 쑤욱! 하늘을 향해 줄기를 뻗는다.
처음 책을 읽었을 때 모죽 이야기가 생각났다. 중국의 모소 대나무. 처음 땅에 씨앗을 뿌리고 4~5년 정도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고 한다. 자라는 건지 마는 건지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이 자리에 씨앗을 뿌렸다는 기억과 팻말뿐이다.
그런데 계속 물을 주고 거름을 주다 보면 어느 순간 죽순이 보이면서 놀라운 속도로 자라기 시작한다. 하루에 7~80센티미터씩 쑥쑥 자라 30미터의 아주 튼튼하고 멋진 대나무가 된다고 한다. 기나긴 시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겉으로 볼 때는 전혀 변화가 없어 보였지만 긴 시간 동안 땅 속에서는 엄청난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뿌리가 주변으로 뻗으며 단단하게 땅을 다지고 저들끼리 얽히고설키고 힘을 키운다.
짧은 이야기지만 책 속의 아이는 참 대견하다. 당근 씨앗은 싹을 틔우리라는 믿음이 있었고 그저 할 일을 하고 기다리면 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결과가 당장 드러나지 않는 일에 지치고 포기할 법도 한데 씨앗을 뿌리고 날마다 물을 주고 잡초를 뽑고 일련의 루틴을 반복한다.
한편으로는 씁쓸하기도 하다. 정작 아이에게 싹이 나오지 않을 것 같다고 말했던 사람은 부모이고 가족이기 때문이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믿음을 주고 지지를 보내야 할 사람들이지만 현실은 종종 그 반대이기도 하다. 사랑한다는 이유로, 너를 아낀다는 이유로, 미래를 생각한다는 이유로 여지없이 아프게 하고 기어이 날개를 꺾어 주저앉게 만든다.
어릴 때부터 나에게 가장 큰 상처를 준 사람들은 가족과 가까운 이들이었다. 먹고살기 바쁘다는 이유로 방치된 정서. 큰일이 생겨도 말할 수 없는 분위기, 가끔은 남이 더 낫다는 생각이 들다가 정녕 내 편은 없다는 것을 느끼고 서늘하게 마음의 문을 닫는다. 그냥 내 일이나 하자고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지만 가슴속에 켜켜이 쌓인 감정의 응어리는 돌덩어리처럼 꽤나 무겁고 크고 단단하다.
아이 둘이 어린이집에 갈 무렵 일을 조금씩 이어가고 싶은 마음에 가르치는 일을 시작했다. 일 년 넘게 도서관에서 봉사와 나눔 강의를 하고 다음 해 집으로 무대를 옮겼다. 아이들을 만나는 일이 즐거울 정도만 하자는 마음으로 시작한 몇 타임의 수업. 반년쯤 지났을까, 이제 슬슬 확장을 해 볼까 하던 찰나 아이는 많이 아팠고 어린이집을 온몸으로 거부하기 시작했다.
혼란스러웠다. 그때만 지나면 된다, 빨리 자리를 잡아야지 그만두면 다시는 힘들다는 충고를 왕왕 들어왔지만 아이의 울음 앞에서는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한다. 어린이집 말고는 도움을 받을 곳 없는 사람이 과연 ‘내 아이를 보내고 남의 아이를 가르치는 것이 맞나’ 싶은 생각이 점점 커진다. 그때 내 안의 어린아이가 말을 걸어온다.
‘모든 것은 때가 있는 거, 엄마아빠의 정서적 부재가 어떤 건지 너도 겪어봐서 알지, 지금 잘해. 나중에 말고. 지금이 아니면 안 돼, 나도 네 아이도 엄마가 필요해. 딱 10년만. 자존심 때문에 더 중요한 걸 놓치지 말라고.’
자존심인지 욕심인지 모를 것을 살포시 접었다. 아이의 울음과 내 안의 외침 덕분이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아이들을 지키는 삶을 선택하겠다고, 시공간의 제약없이 읽고 쓰고 돈 버는 일을 하겠다고 선언할 무렵 코로나가 왔다. 집에서 무언가를 쓰고 깨작거리는 반업주부의 삶. 후회는 없다. 엄마의 자리를 지키며 오직 나만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거다. 요즘은 인터넷만 터지면 뭐든 할 수 있는 세상이니까.
주변에서 뭐라고 한들 그저 이 아이처럼 의연하게 신념대로 행동해 나가고 싶다. 내 씨앗은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을 것임을 의심하지 말자. 누군가가 응원하고 힘을 실어준다면 더없이 기쁘겠지만 그런 기대는 욕심이라는 것을 안다. 접어두고 그저 나의 일을 하자. 씨앗을 뿌리고 날마다 물을 주고 잡초를 뽑는 일이면 된다. 큰 사람이 되기보다 소중한 사람들에게 '제 때'에 소중한 사람이 되자.
아이들이 보는 것을 보고 싶다. 판단하기 전에 우선 잘 들어보자. 마음을 헤아리고 정해진 답이 하나가 아님을 알려주고 싶다. 한두 번 실패하더라도 그것은 과정일 뿐 도전하는 네가 멋있다고, 비난을 받을 이유는 전혀 없다고 토닥이고 싶다.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맨 먼저 달려와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사람, 든든한 지지자가 되어 줄 테다. 내 안의 작은아이가 마음을 놓을 때까지.
어느 새 곁에 다가온 아이와 눈을 맞추며 체온을 나눈다. 너의 마음도 조금 따뜻해졌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