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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사탕앤디 Feb 27. 2022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위로가 필요한 어떤 날

아이와 이어폰을 나누며



"아빠 미워.

나는 다시는 아빠랑 놀지 않을 거야."


"동생 미워.

나는 다시는 동생이랑 놀지 않을 거야."



요즘 날마다 반복되는 시나리오. 신나게 놀다가 즐거움이 최고조에 이르면 마무리는 꼭 울음으로 끝난다. 한참을 삐치고 한참을 본체만체하고, 그러다 다시 눈을 돌려보면 울고불고 싸웠던 애들이 맞나 싶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아무렇지 않은 척 놀이는 시작된다. 물론 '화해' 같은 절차는 가볍게 생략하고. 



삐치면 첫째, 둘째 아이가 번갈아 내게 달려와 하소연을 한다. 잘잘못을 따지며 최대한 자기편에 유리한 판결을 내려주기를 바란다. 시시비비가 명확한 사건에는 나름 정의롭고 지혜로운 솔로몬이 된 것처럼 으쓱거리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대부분은 쌍방과실이다. 잘잘못을 이르면 듣고, 혼내고, 서로에게 이해시키고, 다시 사이좋게 놀기를 당부하지만 평화로운 상태는 단 5분을 넘기지 못한다.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의 아픈 일과 핑계에 반응하기가 힘들어졌다. 감각이 제법 예민한 사람이라 들어주고 반응하니 내 일처럼 힘들어졌다. 어유 또 오지랖, 그냥 토닥토닥하고 말 걸, 왜 그랬을까, 종종 후회도 한다. 나와 관계 맺은 사람들뿐만 아니라 아이들의 투정을 받아줄 마음의 여유도 많이 줄었다. <가시나무>의 노랫말처럼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공간을 한 뼘도 내어주기가 어렵다. 



머릿속에서 무수히 외친다. '나나 잘하자', '나도 바쁘다고', '나도 아프고 힘들다고'. 내 마음의 공간은 한 없이 좁아졌지만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잘 사는 척, 밝은 척, 꼿꼿한 척을 한다. 어쩌면 마음이라는 것, 감정이라는 것은 한방에 무너지는 것을 알기에 최대한 객관적으로, 차갑게 대하려고 애를 쓴다. 그러다 일부러 벽을 세우기도 한다. 때때로 한 번 자리를 내어주면 그 공간을 점령할지도 모른다는 느낌에 소스라칠 때, 지금은 이게 최선이라 당위성을 부여한다. 








"아빠 미워.

다시는 아빠랑 놀지 않을 거야."


방에서 놀던 아이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다가온다. '아, 잘 되고 있는데......'. 친정으로 휴가를 왔고 거실 한켠에 자리를 잡아 끼적이는 중이다. 밥상 위에 랩탑을 올렸다. 바닥에 앉아 두 다리는 앞으로 쭉 뻗고 담요를 덮고 소파에 등을 붙이고 허리를 바르게 펴려고 애쓴다. 


아이들을 재우는 데 둘이 다 있어야 할 필요는 없잖아? 오늘은 남편에게 부탁을 했다. 잘 시간이 다 되어 안방으로 세 남자를 밀어 넣고 30분이면 쓰던 글을 마무리할 수 있다고 약속한다. 그래, 나는 지금 '영감님'이 오신 듯 워드를 열어 다다다 쏟아내고 있다. 그런데 이러면 음...... 머리가 복잡해진다. 


첫째 아이는 내 옆으로 와 털썩 주저앉더니 이내 무릎을 감싸 안고 훌쩍인다. 흐음, 시작이구나. 어떤 상황인지는 충분히 알겠어. 그런데 지금은 엄마가 마음이 아파. 너를 위로할 힘이 없다. 네가 나를 좀 위로해주면 안 되겠니. 속마음을 그저 뇌되이며 한숨이 나오려는 것을 애써 참아본다. 아니, 어쩌면 한숨을 쉬었는지도 모르겠다. 이제 제법 컸으니 엄마의 마음을 알아주기를 바라는 걸까. 아이가 자라면서 부정적인 감정도 드러내는 날이 많아진다. 







"아들, 이리 와. 같이 듣자." 


위로의 말 대신 아이를 내 곁으로 바짝 끌어당겨 꼬옥 안아주었다. 그리고 왼쪽 이어폰을 빼내 아이에게 건넸다. 그렇게 아이와 무릎을 세우고 턱을 괴고 나란히 앉아 음악을 듣는다. 조용히 기타 선율이 깔리고 잔잔한 노래가 이어진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 순간이 깨질까 봐, 그저 둘이 가만히 노래를 듣고 또 듣고, 세 번을 반복해서 듣는다. 그 사이 우리는 말없이 눈물을 훔쳤다. 



"엄마 이거 봐." 

아이가 손으로 무언가를 가리키며 배시시 미소를 짓는다. 눈앞에 보이는 할머니의 네모난 휴지곽, 그 안에 그려진 작은 비행기 그림을 찾아냈다. 피식. 웃음이 나온다. 비행기를 정말 정말 좋아하고 이담에 크면 파일럿이 되고 싶은 나의 작고 작은 아이, 자나 깨나 비행기 생각뿐인데 그걸 보니 마음이 풀렸나 보다. 이내 이어폰을 돌려주며 웃으며 나를 꼬옥 껴안아준다. 



'엄마, 나 이제 괜찮아'라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마음이 누그러졌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안다. 감정은 통하니까. 그냥, 우리의 마음이라는 게 그런 거니까. 음악이 그런 거니까. 때론 말하지 않아도, 애쓰지 않아도 그냥 통하는 느낌만으로도 좋은 거니까. 만족스러운 아이는 일어나 자기 자리로 갔다. 엄마의 자장가가 없어도, 이야기가 없어도 오늘만은 편안하게 잠들 것이다. 



아이가 떠난 자리, 마지막 노랫말이 내 불안한 마음을 찐하게 위로해준다. 만족스럽지 않은 순간들에 대한 이유, 그리고 그것에 대한 처방전. 그래 괜찮아, 괜찮아, 흐르듯 살아도 그냥 괜찮아. 말하지 못할 고민도 상처도 시간이 씻어내줄 테니. 흐르듯 살아도 그냥 괜찮아. 이어폰을 통해 들려오는 소리에 가만히 눈을 감았다. 눈물이 난 것도 같아 이내 아득하고 아늑해졌다. 





너와 울고 같이 웃고

기대하고 아파했지

모든 걸 쏟고 사랑하고

마음이 가는 대로 있는 그대로

말하지 못할 고민거리

깊게 상처 난 자리

늘 같은 속도로 흘러가는 시간이

언제나 그랬듯이 씻어내줄 테니

흐르듯 살아도 그냥 괜찮아 괜찮아도


권진아, <괜찮아도 괜찮아> 중에서


https://youtu.be/1_nOlK3Zvp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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