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가 가져온 무수한 일상들
일요일 저녁.
"아빠 나 다 먹었어.
빨리 영화 틀어줘요."
"안돼.
코로나 검사한 사람 먼저 보여줄 거야!"
"아빠 빨리 틀어줘요.
나중에 틀면 다 지나가버린다고
저건 티브이에서 하는 거라서 되돌릴 수 없어."
OCN에서 <스타트렉 다크니스>가 방영 중이다. 우리 집 TV는 TV 역할을 못하고 주로 영상을 연결해서 보는 모니터로 쓰인다. 주말에만 가끔 TV본연의 역할을 한달까. 남편이 켜 놓은 채널. 영화 1부가 끝나고 쉬는 시간에 간단히 저녁을 먹기로 했다. 짜장 덮밥과 방울 토마토를 준비하고 식탁에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이제 오늘의 남은 일과는 저녁을 먹고 일주일에 세 번 하는 코로나 검사되시겠다. 학교와 유치원에서 키트를 나누어주고 의무적으로 자가 진단을 하고 결과를 보내라 한다.
"으앙. 나 하기 싫은데.
진짜 싫다고!!! 아아아 싫어 싫어.
아까 영화, 빨리, 끝날 텐데 보고 싶다고."
아이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서럽게도 운다.
"아들, 어쩔 수 없어ㅠ
얼른 검사하고 보자. 그럼 되잖아."
"으앙앙.... 알았어... 하면 되잖아.
동생아 나 빌려줘, 용기 모자. 그거 어디 있어?"
훌쩍거리면서 모자를 찾는다. 동생이 며칠 전에 유치원에서 만들어 온 용기 모자다.
"으응 그거 내 보물 상자 안에 있어.
형아도 써봐, 내가 빌려줄게 진짜로 안 아플 거야.
용기가 솟아나서 형아를 지켜줄 거야!
그래서 나도 지금까지 콧구멍이 많이 안 아팠어!"
"에이 시시해, 그게 뭐야"
둘째 아이가 유치원에서 만들어 온 용기 모자를 자랑하자 형아는 시시하다며 코웃음을 쳤다. 동생이 진지하게 말할 때마다 터부시 하다 막상 자가 진단을 할 때가 되니 위로가 되어 줄 만한 물건이, 그런 존재가 필요했나 보다.
그날은 꽃샘추위로 바람이 몹시 부는 어느 봄날이었다. 모자를 쓰고 유치원 버스에서 내리며 의기양양하게 걸어오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편의점 이모한테도 보여줘야겠다며 단단히 모자를 붙잡은 채로 문을 열고 쏙 들어간다.
아이는 퀴즈를 내며 조목조목 설명한다. 처음에는 엄마도 편의점 이모도 그저 인디언 모자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인디언 모자가 아니라 '피터팬의 용기 모자'였던 것이다. 어른들이 답을 맞히지 못하고 겸연쩍어하는 모습을 보자 아이는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어른들도 모르는 것이 있다는 낯섦과 잘 알려주었다는 뿌듯함. 이 모자를 쓰면 무서움이 줄어든다는 것도, 그래서 코로나 검사도 안 아프게 후딱 할 수 있다는 것도 몰랐겠지? 바람이 많이 부는 이런 날에도 모험을 떠날 수 있다는 것도.
몰라서 더 용감한 것도 있고 알아서 더 두려운 것도 있다. 모를 때는 얼떨결에 코를 후비고 검사했는데 이제 적나라하게 그 느낌을 알아버렸다. 아니까 더 피하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 같은 반에 확진이 나와 이틀에 한 번 검사지를 내기로 해서 어쩔 도리가 없다. 학교가 조금 재미없지만 그것보다 코로나 검사하는 것이 싫어서 학교에 가는 것이 싫다고 엄살을 부린다. 다른 친구들도 비슷한 마음이다.
날마다 개인 물통과 수저를 챙기고 등교, 등원을 하는 것에 익숙해질 무렵 1학년은 끝이 났다. 수료식을 하긴 했었나, 기록을 뒤적이지 않으니 기억나지도 않는 날들을 스치며 첫째는 덩그러니 2학년이 되었다. 둘째 아이는 줌으로 잠깐 여섯 살 친구들의 얼굴을 보고선 유치원 큰 형님이 되었다. 코로나 시작과 함께 시작된 집콕 생활부터 지금까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 짠한 마음이 올라온다.
"엄마 뭐 무서운 거 있어?
그럼 나한테 말해요. 내가 용기 모자 빌려줄게요.
그리고 잊지 않게 공책에 이렇게 적어요!"
"용기 모자는 무서움을 없애준다!"
"응 알았어. 꼭 빌려달라고 할게.
그런데 무서움 대신에 두려움을 없애준다고 쓸까?
(무서움보다는 두려움이라는 단어가 나을 것 같아서 괜히 물어본다.)"
"아니! 두. 렴. 아니고 무. 서. 움!
엄마 다시 불러줄까? 이렇게 적어요.
용기 모자는 무서움을 없애준다!"
"알았어, 그렇게 쓸게."
아이는 자신이 말한 대로 노트에 꾹꾹 눌러 적어 내려 가는 엄마의 모습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씨익 웃는다. 형아와 함께 키득키득 웃으며 그래도 용기 모자가 있어서 다행이란다. 이제 스스로 두려움을 해결할 줄 아는 방법을 하나쯤 더 알게 된 것일까. 해답을 만들어 낸 녀석들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미소가 지어진다.
문득 궁금하다. 그 어린 날 나만의 용기 모자는 무엇이었을까? 또 지금은 무엇일까? 살아가며 용기가 필요한 날이 자꾸만 생긴다. 일상의 번뇌와 외로움을 글쓰기와 명상, 산책하기, 심호흡하기, 노래 등 알록달록한 용기 모자로 달래곤 한다. 그래도 힘들 땐 아이에게 용기 모자를 빌려 써야겠다. 그리고 꼬옥 껴안아달라고 해야지. 그럼 두려움은 사르르 녹아버리고 대신 용기가 솟아날 거다. 그렇게 아이처럼 믿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