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요한 것만 남기는 기술을 가지고 싶다

엄마 13년 차, 간소한 삶은 어디에

by 앤디 황미영

이 집으로 이사 온 지 벌써 9년 차가 되어간다. 이렇게 오래 살 생각은 아니었는데 어쩌다 보니 시간이 금세 이렇게 흘러버렸다. 두 아기도 쑥쑥 자라 이제 어엿한 십 대 어린이가 되었고, 흘러온 시간만큼 손때 묻은 추억의 물건도 차곡차곡 쌓였다. 문득 돌아보니 온 집안이 물건으로 가득 찬 느낌이다. 거실과 방은 아이들의 물건과 책으로, 주방은 자잘한 살림살이가 가득하다. 분명 주기적으로 정리를 하고 있는데 어찌 된 영문일까.


화장대와 알파룸을 거쳐 내 방이 생긴 지 이제 2년 정도 되었다. 처음 침대만 놓인 빈방을 마주했을 때의 설렘과는 달리 어느 순간 책이 가득 찼다. 공부를 위한 전공서적과 강의에 필요한 책과 그림책, 참고 자료, 좋아하는 작가들의 책, 선물 받은 사인본과 굿즈 등... 넘치다 못해 보조 책상과 바닥에 여러 개의 책탑이 차곡차곡 쌓여있다. 이건 무슨 부처님께 비는 소원탑도 아니고. 점점 감당하기 힘들어진다.


요전 날은 수업에 참고할 그림책 한 권을 찾느라 책장을 다 뒤졌다. 자주 들여다보는 책은 책장 열두 칸에 주제별 작가별로 정리해 두기에 당연히 그 자리에 있으리라 생각했다. 분명 이쯤에 꽂아두었는데 이상하다. 기억을 더듬으며 찾아보지만 없다. 혹시나 책방에 두고 왔나 싶었지만 책방에도 없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찾느라 뒤적뒤적하다가 시간이 저만치 흐른다. 제풀에 지쳐 포기한 순간, 다시 새로운 조합의 책탑이 쌓인다. 하하.




사실 날마다 정리하는 건 엄마들에게는 일상이다. 조금씩 정리하고 날마다 조금씩 비워내고 있지만 티가 별로 안 난다. 덩달아 자기 효용감도 낮아진다. 치우는 속도보다 어지르는 속도가 더 빠르고, 밖으로 내보내는 양보다 들어오는 양이 훨씬 많이 때문이다. 게다가 우선순위는 공유 공간인 주방과 거실이 먼저고 나는 후순위다. 그래서일까, 나의 공간이 더욱 방치되는 느낌을 받는 건.


안 되겠다 싶어 작년부터는 순서를 바꿨다. 내 방을 일 순위로 올렸다. 책장을 포함한 영역을 먼저 정리하고 살피기로 했다. 내 일의 형태는 프리랜서에 가깝고, 읽고 쓰고 기획하는 시간이 책방 업무와 강의에 큰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잘 되고 있냐고? 아니. 새벽에 일어나 읽고 쓰고 정리하고 있으면 금세 아침 먹을 시간이 된다. 퇴근하고 돌아와 조금 정리하면 또 밥때가 온다. 자동으로 주방으로 가서 식사 준비와 동시에 정리를 하게 된다. 어디를? 일단 눈앞에 주방과 거실을. 내 방은 다시 제자리다.


가끔 아니 자주 허탈하다. 이러다 정말 물건에 잠식당할 것 같다. 여유롭게 쉬고 다시 에너지를 얻을 수 있는 공간이 도리어 에너지를 빼앗는 공간이 되고 있다. 물건을 찾는 시간도 아깝고 의욕이 가라앉는다. 그래도 어쩌랴 내가 해야지. 잠시 우울했다가 다시 일어나 정리를 시작한다. 음악을 틀어놓거나 스트레칭을 하며 기운이 나는 듯 나를 속인다. 오늘은 이 책장 한 칸을 반으로 줄이리라. 오늘은 바닥에 쌓인 책탑 하나를 정리하리라. 소중한 기록과 책들에게 자기만의 자리를 찾아주리라.




버리는 것이 우선이 아니라 간직하고 싶은 것을 우선적으로 선별한다. 오래되었지만 내 삶에 울림을 준 책,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도움을 준 책을 먼저 골라 가까운 곳에 놓는다. 재독 할수록 좋은 책, 내 역사가 담겨있는 기록집을 챙긴다. 상태가 좋은 책은 책방에 오는 분들과 함께 볼 열람용으로 따로 분류해 둔다. 이제는 헤어져도 좋을 철 지난 책도 과감히 정리한다. 쑥쑥 자라는 아이들에게 작아진 옷처럼 필연적으로 헤어져야 하는 시간이다. 소유하기도 기증하기도 애매한 책은 밑줄이 많은 페이지만 다시 읽고 기록한다.


앗, 벌써 밤 11시다. 새벽에 일어나 움직이려면 자야 한다. 작은 성과에 옅은 한숨이 나오지만 조금이나마 가벼워진 것에 의의를 둔다. 개운한 마음이 단 하루 가기도 힘들겠지만, 단지 그뿐이라도 계속해야 하고 반복해야 한다. 이 과정은 하루아침에 끝나는 것이 아니고 어쩌면 살아가는 내내 반복될 일이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건 마치 백지를 마주한 막막함을 넘어서 글을 쓰는 것일 테고, 그다음 고치고 또 고치는 과정을 반복하는 것과 같을 것이다. 또한 사랑하는 아이들과 남편과 지지고 볶고 울고 웃는 생의 순간을 반복하는 것과도 같을 것이다.


그래도 반복하다 보면 백지에 쌓인 글은 하나의 책이 될 것이고 아이들은 성장하며 어느 순간 어른이 될 것이다. 그만큼 나는 노인이 되어 갈 것이고. 그런 분명한 사실 앞에서 체념이나 회의보다 기쁨으로 임하는 사람이 되어보기로 한다. 그러니 손을 멈추고 작은 성과를 만들고자 애쓴 나에게 질책보다 격려를 보내기로 했다.


가벼워지고 싶고 일상에 필요한 것만 남기고 싶다. 중요하고 가치 있는 것들만 삶으로 들이고 싶다. 인생 책 백 권, 나에게 어울리는 옷 몇 벌, 아끼고 자주 사용하는 물건만 함께하고 싶다. 갑자기 이곳을 떠나야 할 상황이 생기더라도 훌쩍 가볍게 떠날 수 있는 정도의 무게만 허용하면 어떨까. 나를 기쁘게 하는 시간과 소중한 이들에게 쓸 에너지를 남겨두고 싶으니까. 그러니 또 이 지루한 시간을 반복하는 수밖엔.



(아이들 물건은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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