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망의 끝에서

공주는 잠 못 이루고, <Nessun Dorma>

by 김환

노래가 시작된 자리


TV 채널을 돌리다 우연히 영국의 한 오디션 프로그램을 보게 되었다.

무대에 선 이는 평범한 휴대전화 외판원이었다.


그가 푸치니의 <공주는 잠 못 이루고>를 부르기 시작하자, 공기가 달라졌다.

기교보다 앞선 것은 삶이었고, 노래는 그 삶을 숨기지 않았다.


그날 이후, 언젠가 나도 이 아리아를 불러보고 싶다는 바람이 마음 한편에 자리 잡았다.

그것은 동경이라기보다 스스로에게 건넨 작은 약속에 가까웠다.


<공주는 잠 못 이루고>는 푸치니의 마지막 오페라 《투란도트》에 등장하는 아리아다.

이름 없는 왕자가 사랑과 운명을 향해 나아가며 새벽의 승리를 예언하는 노래.

그 노래는 어느새 내 삶에도 하나의 이정표가 되어 있었다.



Amor Vinci Omnia – 한 공간의 증명


그 희망을 품은 채, 나는 2024년 9월 로마의 카라칼라 욕장 앞에 섰다.

아직 말로 다 하지 못한 감동을 품은 채, 그해 늦가을 제주로 돌아왔다.


12월의 제주.

‘Amor Vinci Omnia(사랑은 모든 것을 이긴다)’라는 문구와 작은 바이올린 모형이

간판보다 먼저 시선을 붙잡는 카페를 찾았다.


문을 열자, 이국적인 정적이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한쪽에는 직립 피아노가 놓여 있었고,

테이블 위 나무 바이스들은, 이곳이 카페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말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늦가을 볕이 창으로 스며들고,

벽난로의 불꽃이 잦아드는 사이,

클래식 선율은 말없이 마음을 감싸 안았다.


다식을 내오던 여주인은 웃으며 말했다.


“제 남편은 전생에 유럽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음악 애호가였대요. “


농담처럼 들렸지만,

그 말에는 이 공간을 지탱해 온 삶의 시간이 배어 있었다.

사랑과 음악, 그리고 오랜 세월이 쌓여 만든 분위기는

설명보다 먼저 몸으로 전해졌다.

그곳에는 시간이 퇴적되어 있었다.


‘Amor Vinci Omnia’

처음 마주했을 때는 낭만적인 수사처럼 보였던 문구가

이제는 그들의 삶을 관통해 온 신념처럼 다가왔다.


그 순간, 내 안에서 노래 하나가 고개를 들었다.

단순한 승리의 찬가가 아니라

때로는 눌러두어야 했던 저항과 희망의 목소리.

<Nessun Dorma>였다.


그 노래는 이 공간의 환대처럼,

크게 외치지 않아도 끝내 사라지지 않는 마음 같았다.


노래가 끝나자,

주방에 있던 남편은 손수 만든 판나 코타 한 접시를 내어왔다.

말 대신 건네진 마음이었다.


음악의 여운은 디저트로 이어졌고,

그날 카페에 울려 퍼진 노래는

아리아를 넘어 사랑과 기억이 공간과 겹쳐진

조용한 송가로 남았다.


시간과 장소를 건너며,

이 노래는 어느덧

내 삶을 꿰는 레퍼토리가 되었다.



로마, 새벽의 승리


《투란도트》는 푸치니의 마지막 오페라다.

그는 완성을 앞두고 1924년 세상을 떠났고,

작품은 제자 프랑코 알파노에 의해 마무리되었다.

그래서 이 음악은 지금도

각자의 삶 속에서 다른 방식으로 완성된다.


<공주는 잠 못 이루고>는

절제된 시작에서 점차 고조되어

폭발적인 고음으로 정점에 이른다.


세계 무대에서는 흔히 ‘승리의 찬가’로 불리지만,

내게 이 노래는

사랑과 기억, 저항과 치유가 겹쳐진 삶의 노래였다.


2024년 9월 19일,

나는 로마의 카라칼라 욕장

Terme di Caracalla 앞에 섰다.


이곳은 1990년 로마 월드컵 전야제에서

세 명의 테너가 한 곡의 노래로 시대의 환호를 묶어냈던 장소이기도 했다


그날 울려 퍼진 <Nessun Dorma>는

환호 속에서 공간을 채웠고,

거장들의 몸짓에는

무대 너머의 인간적인 온기가 담겨 있었다.

카라칼라욕장(공주는 잠 못 이루고).jpg

로마, 카라칼라 욕장


로마에 도착한 첫날 오후,

나는 테르미니 역에서 Via Cavour를 따라 걸었다.

콜로세움을 지나

막시무스 경기장을 돌아

Porta Capena 광장을 지날 때,

오래 마음속에 그려왔던 유적이

눈앞에 펼쳐졌다.


현실과 기억이 교차하는 순간이었다.


나는 조용히 시작했다.


“Nessun dorma! Nessun dorma!

Tu pure, o Principessa…

All’alba vincerò!”


"아무도 잠들지 마라! 아무도 잠들지 마라

그대 또한, 공주여...

새벽이 오면 내가 승리하리라"


잃어버린 목소리를 되찾기 위해

걸어온 시간이 스쳐 지나갔다.

그것은 노래라기보다

존재를 확인하는 몸짓에 가까웠다.


멀찍이 걷던 두 사람이

그날의 청중이었다.


푸치니는 소리를 넘어

믿음과 투쟁,

그리고 새벽을 기다리는 희망을 남겼다.


숙소로 돌아오는 한 시간여,

발걸음은 유난히 가벼웠다.


그날의 로마는

한 곡의 노래가 끝난 뒤에도

내 삶의 리듬을

조용히 바꾸어 놓은 도시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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