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엽>
가을 문턱에 들어서면
어김없이 떠오르는 선율이 있었다.
“감기 조심하세요!”
이 말과 함께 텔레비전 화면 어딘가에서
조용히 흘러나오던 노래,
바로 <고엽 Les feuilles mortes>이었다
설명보다 먼저
마음에 내려앉던 노래.
내게 이 곡은 오래전부터
‘가을의 노래’로 각인되어 있다.
2023년 10월 초,
캐나다 로렌시안 산맥의 몽트랑블랑을 찾았다.
아내와 가까이 지낸 두 모자가 함께한 여행이었다.
그들은 십여 년 전부터
가족 한 자리를 비워 두고
시간을 살아온 사람들이었다.
뜻밖의 초대였지만,
그 기억은 오래 남았다.
단풍은 숲을 물들였고,
나는 그 숲을 홀로 거닐었다.
바람 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던 시간.
그때,
오래 묻어 두었던 계절이
불현듯 고개를 들었다.
내 안의 노화 시계가 빨라지던 시간
암 수술을 앞두고,
나는 목소리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잠겨 있던 시기였다.
숨이 예전보다 짧아졌고,
말 한 문장을 끝까지 밀어 올리는 데
더 많은 힘이 필요해졌다.
그 변화는
몸에만 머물지 않았다.
2018년 12월 말,
나는 수술대에 올랐고
석 달 뒤에는
33년 동안 몸담았던 교직을 떠났다.
그때부터
삶은 더 이상
이전의 방향으로 흐르지 않았다.
가장 힘들었던 것은
수술 이후의 시간이었고,
그것은 회복이라기보다
몸과 다시 조율하는 나날에 가까웠다.
갑상선과 림프절을 절제한 후,
몸이 말을 듣지 않을 때,
일상은 사소한 일부터 무너졌다.
음식을 삼키는 일도
그중 하나였다.
쉰 목소리는 자주 갈라졌고, 허공에서 끊기곤 했다.
목에는 늘 이물감이 남아 있었다.
발성장애는 가족과의 대화마저 줄였고,
기쁨이 사라진 자리에 피로와 좌절이 밀려왔다.
‘성공적 노화’라는 말을
오랫동안 강의실에서 사용해 왔지만,
그해 겨울 이후
그 말은 내 삶에서 조용히 자취를 감췄다.
긴 회복의 시간을 지나며
한 가지가 남았다.
노년은 물러나는 시간이 아니라
삶의 깊이를 바라보게 되는 때라는 것.
훗날에야 알았다.
하이데거는 이런 상태를
‘죽음을 향해 살아가는 존재’라 불렀다.
그 말은 설명이 아니었다.
아침마다 몸의 상태를 먼저 살피게 되던
그 시절 내 마음에
더 가까운 쪽이었다.
낙엽은 소멸이 아니었다.
나무는 마지막까지 시간을 물들이고,
그 질서 앞에 인간은 고개를 끄덕일 뿐이다.
짧은 여행이었지만,
돌아올 때 풍경은 달라져 있었다.
나무들은 남은 빛을 끝까지 끌어올렸다.
단풍잎은 땅에 내려와 누웠고,
다음 생을 향해 몸을 거두고 있었다.
그 풍경에 스치는 노래가 있었다.
빠른 리듬이 아니라
느린 호흡으로,
마치 자신과 대화하듯 부르는 노래,
<고엽>이었다.
지나간 사랑과 시간,
삶의 굽어온 흔적들이
그 노래 안에 남아 있다.
이브 몽탕의 목소리는 관조적이었다.
”그대는 나를 사랑했고, 나는 그대를 사랑했지,“
”그리고 바다는 모래 위에 새겼던 연인들의 흔적을 지우고 가네요. “
이 노래는
각자의 기억 위에
다른 방식으로 내려앉는다.
누구에게나
하나쯤은
건너온 계절이 있으니.
우리는
언제부터
노래를 듣기보다
버티기 위해
붙잡게 되었을까.
<고엽 Les feuilles mortes>은
그렇게
내 삶의 가을에 들어왔다.
숲이 말을 멈췄을 때
그 선율이 내 마음에 머물러 있던 어느 늦가을이었다.
나는 구글 맵을 켜고
이브 몽탕(1921~1991)의 발자취를 따라갔다.
목적지는 파리의 올랭피아 극장.
그가 <고엽>을 불렀던 무대였다.
2021년 12월 1일.
톨비악 역에서 메트로 7호선을 타고 열두 정거장.
오페라 역에 내려
오페라 가르니에를 지나
센강 쪽으로 몇 분을 걸었다.
시간은 그렇게 이동하고 있었다.
파리 도심의 소란한 가운데서도
올랭피아 극장은 또렷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침묵하지 않았던 목소리
1888년 개관한 이 극장은
몽탕이 예술의 정정을 이룬 곳이다.
그는 젊은 날 이 무대에 섰고,
삶의 여러 굴곡을 지난 뒤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다.
올랭피아는
그의 출발점이자 귀환지였다.
<고엽>은 1946년 영화
《밤의 문 Les portes de la nuit》을 위해 만들어졌다.
시인 자크 프레베르와 작곡가 조제프 코스마의 작품으로,
가을의 쓸쓸함과 지나간 사랑에 대한 회한을 절제된 감성으로 담았다.
카퓌신 거리의 올랭피아 극장
이후 영어로 번안된 <Autumn Leaves>는
냇 킹 콜의 목소리를 통해 재즈의 고전이 되었지만,
이 노래가 가장 빛난 순간은
무대 위 몽탕이 낮고 깊은 목소리로 읊조리듯 부를 때였다.
이브 몽탕은
가난한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나
노동과 허기를 먼저 배웠고,
전쟁의 그늘을 지나
파리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노래는
생존의 수단이 아니라
삶의 태도가 되었다.
그래서 그의 <고엽>은
젊은 사랑의 회상이 아니라,
시간을 통과해 온 목소리로
남았다.
1946년 이후 이어진 그의 무대에서,
노래는 언제나
개인의 감정을 넘어
시대의 고통에 귀 기울이는 방식으로
불려졌다.
그에게 노래는
입장이 아니라 태도였다.
삶의 밑바닥에서 일어난 그는
침묵 대신 노래를,
외면 대신 연민을 택했고,
가난과 허기의 기억을
따뜻한 위로로 되살렸다.
1981년 올랭피아 공연에서
그는 그렇게
관객과 호흡하며 노래했다.
낮은 목소리의 시간
누군가는 이런 장소를
‘기억이 쌓이는 공간’이라 불렀다.
올랭피아 극장은
내게도 그런 곳이었다.
시간과 감정이
이곳에 먼저 도착해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그 앞에 서니,
한 시대의 정신과 한 예술가의 신념이
가을 나무 잎사귀처럼 켜켜이 쌓여
내 기억 속에서 되살아났다.
그가 낮은 목소리로
과거를 읊조리듯 노래하는 까닭은
말하지 않아도 드러나 있었다.
그를 따라가다 보니,
나는 다시
내 계절로 돌아와 있었다.
다시 찾아온 고엽의 계절,
비가 그친 파리에
북풍이 불고,
젖은 낙엽들이
길모퉁이에 쌓여 있다.
거리마저 숨을 죽인 듯 고요하다.
몽탕의 <고엽>을 부르기에 더없는 날이다.
“아, 난 당신이 기억해 주었으면 해요.
우리가 연인이었던 그 시절을…”
“Oh! je voudrais tant que tu te souviennes.
Des jours heureux ou nous etions amis…”
삶은 낙엽처럼 스러져도,
계절은 이어진다.
그 사실을
누군가는 지금,
이 계절의 한가운데서
처음 맞고 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