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한 제자가
정지용의 이름이 붙은 상을 받았다.
그 소식을 듣고
나는
오래 묵혀 두었던 숨 하나를
조심스레 고르는 기분이 들었다.
수상식 날,
그는
노래 한 곡을 부탁했다.
돌아보면
그날은
누군가의 곁에서
말이 물러나고
숨이 자리를 대신한 순간이었다.
정지용의 시에
채동선이 곡을 붙인
가곡 <고향>이었다.
기교는 서툴렀다.
그러나 마음만은
숨기지 않았다.
<고향>은
돌아갈 수 없는 장소에 대한 노래였다.
정지용과 채동선,
두 사람 모두 귀환자였으나
그들이 마주한 조국에는
더 이상 고향이 남아 있지 않았다.
산천은 그대로였지만,
삶의 감각은
이미 닫혀 있었다.
그해 늦가을,
그와 함께 찾은
전남 벌교의 채동선 음악당에서는
<고향>의 선율이
잔잔히 흐르고 있었다.
‘제 모습을 잃은 고향의 슬픔을 노래한 가곡’
그 설명을 읽는 순간,
서로의 숨이 겹쳐 완성된
또 하나의 노래가
떠올랐다.
가곡 <산노을>이었다.
<고향>이 돌아갈 수 없는 장소에 대한 노래라면,
<산노을>은
돌아올 수밖에 없는 기억에 대한 노래였다.
그때는 알지 못했다.
이 노래가
산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오래 불리게 될 줄은.
언제 처음 만났는지는
이제 중요하지 않다.
산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이 노래는 늘
먼저 와서
지나간 시간들을
불러냈다.
그리고 훗날,
그 숨이,
또 다른 사제의 호흡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것도.
그 숨이
처음 닿았던 풍경은
야트막한 고향의 산부터,
사방이 불쑥불쑥 솟아
시야를 가로막던
강원도의 산들까지였다.
그 시절 나는
초병의 시선으로,
산허리와 능선을 흝었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위에서 아래로.
두고 온 고향과
사무치는 그리움은
그 산처럼 무거웠다.
그 시절, 산은
풍경이 아니라
언제든 넘어올 수 있는
경계였다.
그 기억은
전역 후에도
한밤의 가위눌림으로
되살아나곤 했다.
훗날 이 노래가 불러낼
산의 원형은
바로 그곳에 있었다.
시간은 흘러
우이동에서 출발한 한 행사 길에서
버스는 우연처럼
내가 훈련을 받았던
파로호 인근을 지나고 있었다.
한때는
그 방향을 향해
몸조차 돌리지 않던 시절을
문득 떠올렸다.
전역 신고를 하러 갔던 날이다.
대대에는
나 혼자뿐이었다.
거수경례를 올리고
"신고합니다"라고 외치자
그는 말했다.
“김병장,
신고는 무슨 신고인가.
이리 와, 앉게.”
저녁 무렵 시작된 이야기는
밤이 깊도록 이어졌다.
돌이켜 보면,
나는 그의
큰 산그림자 아래서
그 시간을
끝까지
지나올 수 있었다.
산속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생각하는 일 정도였다.
기억들은
시간 속에서
사라지지 않았고,
다만 보이는 것이 되었다.
이제는
또 다른 그리움으로
내 안에
조용히 자리를 잡았다.
“먼 산을 호젓이 바라보면
누군가 부르네
산 넘어 노을에 젖는
내 눈썹에
잊었던 목소린가”
그 개인적인 기억 위에
이 노래는
하나의 작품으로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
<산노을>은 1972년,
유경환의 시에
박판길이 곡을 붙인 가곡이다.
지리산의 노을
하루가 끝났다고 말하기엔
아직 남아 있는 감정이 있었다.
노래는
쉽게 제자리를 찾지 않는다.
한 음은 머물고,
다른 음은
아직 돌아오지 못한 채
어스름을 서성인다.
하루는 끝났다고 말하지만,
마음은
아직 문을 닫지 못한다.
그 흔들림 속에서
산 위의 노을은
천천히,
사라지는 법을 배운다.
곡을 만든 두 사람은
사제관계였다.
제자의 시에
스승이 곡을 붙이며
하나의 호흡은
다른 시간으로
건너갔다.
그 노래를 부르며,
나는
또 하나의 사제의 호흡을 떠올린다.
노래는 그렇게,
세대를 건너며
같은 숨으로 살아남는다.
누군가는
생을 건너는 법을 가르쳤고,
누군가는
노래를 건너게 했다.
이름은 달라도,
그 호흡은 같았다.
우리는 모두
그렇게
누군가의 숨을 빌려
삶을 건너고 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