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스무 살에게

영화 <윤희에게>가 끝나고 난 후

by 류예지


3월에는 정말 많은 일이 일어났다. 대학교 입학과 더불어 엄마의 취업, 아빠의 결혼식까지.

19년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였던 두 분에게 가장 큰 변화가 한꺼번에 찾아온 시기였다.

결혼식장에서 만난 아빠는 전에 없던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빠의 미소를 보며, 만약 아빠가 자신의 결혼 소식을 엄마를 통해 내게 전했다면 어땠을까.

아마 나는 이렇게까지 아빠의 결혼을 축하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저, 자신의 행복을 위해 떠나는 아빠가 이기적이었다고 생각했겠지... 어른들은 다 그래.


하지만 아빠는 조금 달랐다. 지난했던 아빠의 삶, 엄마와의 결혼생활에 대해 지루하게 나열하지 않았다.

그저, 새엄마의 존재가 자신에게 얼마나 중요한 지를, 마치 스무 살 청년처럼 말해주었다.

“전과 같지 않다고 느낄 수 있겠지만, 언제나 너를 사랑할 것이란다.”


그 순간, 어이없게도 마음 한편에 아빠의 불행을 조금이라도 빌었던 내가,

진심으로 아빠를 응원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이제 스무 살이니까, 아빠를 이해해야 해.


그런 대단한 결의에서 나온 결정은 아니었다.

스무 살이 된 지금, 섣불리 ‘어른’이라는 자격을 부여받지 않을 작정이었으니까.




엄마는 눈코 뜰 사이 없이 바빴다.

새롭게 일하게 된 식당에서 배워야 할 것이 너무 많다고 했다.

마치 우리 집에 대학생이 두 명이나 된 것처럼.

일을 마치고 곤하게 잠든 엄마를 보면서,

노트에 빼곡하게 적어둔 메모의 흔적을 보면서,

외삼촌의 말처럼 엄마는 학창 시절 아주 똑똑한 아이였음을 실감하곤 했다.


단정한 글씨체, 총기 가득한 눈빛, 할말은 하고야 마는 성격,

그러다 불현듯 짓는 얼음공주 같은 미소,

나는 언제나 엄마의 그런 모습을 닮고 싶었다.

하지만 가끔 딸은 엄마의 가장 나쁜 부분을 닮기도 한다는 것을 그때의 나는 알지 못했다.


쉽게 단정 짓고 싶지 않지만, 엄마는 쥰 아줌마를 만난 이후로 변했다.

처음엔 표정 정도의 변화만을 인지했다.

하지만 나중에야 깨달았다.

삶을 바라보는 엄마의 태도가 바뀌었다는 것을.

생각했던 것보다 두 분의 만남이 짧았다는 것을 상기했을 때,

그 몇 시간의 대화가 엄마를 저렇게 변화시켰다는 것이 신기했다.

엄마는, 쥰 아줌마와 무슨 얘기를 나눴을까?

다음을 기약하긴 했을까?

그러나 내가 가장 궁금한 것은 이런 것이었다.

누군가와

이십 년 가까이 만나지 못한다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이제 막 스무 살이 된 나는,

절대로 가늠할 수 없는 엄청난 시간이다.

하지만, 나는 엄마와 쥰 아줌마의 짧았던 만남에 대해 묻지 않았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무심히 건너온 엄마의 말, “새봄, 고맙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느꼈으므로.


하지만 때론 그런 만남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남이 보기에 수선스럽게 기뻐하는 티가 나지 않더라도,

조용히 끓어오르는 주전자 속 물 같은 만남도 있다는 것을...

쥰 아줌마를 향한 엄마의 마음은

그런 방식의 그리움이었을 것이라고 말이다.


이제 곧 경수가 온다.

서울에 볼일이 있어서 온다고는 했지만, 그 볼일이 나라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다.

졸업식 때 함께 찍었던 사진을 현상해서 가지고 오겠다고 했다.

경수의 카메라에는 나의 어떤 표정이 담겨 있을까.

옅게 화장한 얼굴, 조금 더 자란 앞머리,

바쁜 학교 생활에 몇 킬로쯤 줄어든 내 모습을 보고

경수는 어떤 말을 할까.


서울로 이사를 가던 날, 경수는 결국 나오지 않았다.

트럭에 잔뜩 실린 짐을 보면,

정말 우리가 헤어지는 것만 같아 그러고 싶지 않다고 했다.

우리는 많은 것을 기약하지 않았다.

천천히 우리를 변화시킬 시간의 힘을,

지금은 아무리 설명해도 눈치채지 못할 테니까.

여전히 나는, 다가올 시간이 우리를 어떻게 변화시킬지를 알 수 없다.

알 수 없기에, 그 미완의 여정이 두렵고 기대가 되는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그저 나를 향해 걸어오는 경수를

뷰파인더로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하고 싶다.


인사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손을 들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가늠하며

바보처럼 미소 짓고 있는 그의 모습을.





https://movie.daum.net/moviedb/main?movieId=128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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