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작은 아씨들>이 끝나고 난 후
베스는 자신이 죽어가고 있다는 걸 어렴풋이 알아챘다.
꿈을 잃어버린 잿빛 눈으로 뉴욕에서 돌아온 조와 함께,
바닷가를 다시 찾았던 어느 오후였다.
조와 대화를 나누던 어느 시점에서였는지 확신할 수 없지만,
베스는 아주 잠깐 성홍열을 앓았던 그 날로 돌아갔다.
병마를 털고 일어났지만, 이후로 베스의 가슴에는
그 암담했던 시간이 각인한 흔적, 일종의 예감 같은 것이 아로새겨졌다.
희망찬 미래를 상상할 나이에,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는 것은 형언하기 어려운 슬픔에 홀로 맞서는 일이었다.
하지만 베스는, 구태여, 두려운 표정으로 죽음을 맞이할 생각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바닷가에서
자신의 진심에서 꼭 한 발자국 거리를 둔 채,
글 쓰는 일이 이제 넌덜머리가 난다고 말하는 조를 보며
이미 죽음에 한 발자국 다가서 있는 베스는 슬몃 미소 지었다.
'거짓말쟁이.
저런 표정은 조와 어울리지 않아.'
베스는 언제나 자신의 꿈과 삶에 충실한 조를 부러워했다.
자매가 자매의 삶을 부러워하는 일은,
자매가 자매와 싸우느라 시간을 허비하는 것만큼이나 부질없는 짓이었다.
그렇기에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대상을 향해 갖는 진저리 나는 감정이야 말로,
그것을 진정으로 사랑했던 사람만이 낼 수 있는 표정이기에,
베스는 조가 지금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는 중이라고 생각했다.
베스는 다른 자매들에 비해 자신을 좋아하는 일을 지독히 어려워했다.
무언가를 욕망하는 것조차 서툴렀다.
하지만 피아노 앞에서만큼은 달랐다.
그때만큼은 부모님도,
밤새 글을 쓰느라 손톱 끝에 검은 잉크 물이 가실 날이 없는 조도,
누구나 호감을 느낄만한 아름다운 미소를 가진 메그도,
세상에 자신을 당당히 내세우는 방법을 아는 에이미도,
모두 베스의 음악이 울려 퍼지는 피아노 곁으로 몰려들었으니까.
하지만 그 시절, 대부분의 여성이 그랬던 것처럼
베스는 피아노 연주로 먹고살기가 어려웠다.
차라리 피아노를 연습하기보다는
누구나 호감을 느끼게끔 아름다운 미소,
인자한 표정을 연습하는 일이 나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베스는 그 모든 것에 무감했다.
건반을 누르는 대로 여러 가지 음색을 창출하는,
그냥 피아노라는 존재 하나면 충분했다.
사람 안에서 인위적인 관계를 맺기보다는,
상대로 하여금 내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해 가슴 졸이기보다는
사람 밖에서 사람이 짓는 다양한 표정을 살피는 일이 좋았다.
돌이켜보면, 그런 삶도 있는 것이다.
굳이 재능으로 연결 짓지 않아도,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을 그저 섬기듯 존중하는 채로 남겨두는 것,
비록 극을 이끌어가는 주인공은 아닐지라도,
극을 풍부하게 만드는 앙상블이라는 존재로 커튼콜이 울려퍼질 때까지 무대를 지키는 것.
베스는 죽어가는 순간에, 오직 그것만을 생각했다.
그런 시간도 가치가 있었다고,
그런 인생도 충분했다고 말이다.
동이 트기 전, 융단처럼 펼쳐진 짙은 어둠 속에서,
베스는 자신을 간호를 하다가 잠든 조에게 손을 뻗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조의 손까지 쉽사리 가닿지 않았다.
검은 베일이 천천히 자신의 얼굴을 향해 내려오고 있었으므로.
베스는 이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단 한 가지뿐임을 깨달았다.
침대 맡 의자에서 잠든 조의 얼굴을 바라보는 일,
성홍열을 앓던 그 날 밤,
절대로 조용히 가지 말라고,
싸우고 싸워서 꼭 이겨달라고 말하던 조의 간절한 목소리를 기억하는 일,
자신을 걱정하고 염려하는 모든 가족들이
이제는 자신의 행복을 위해 살기를 염원하는 일...
기도문 같았던 중얼거림이 끝난 후,
피아노를 연주하는 일을 가장 사랑했던 베스의 두 손은
그대로 침대 위로 포개졌다.
베스 마치.
마치 家의 셋째 딸.
검은 베일이 드리워진 베스의 감은 두 눈은
동쪽 하늘을 서서히 물들이는 여명의 아름다움을 끝내 알아채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