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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예지 Dec 14. 2020

달맛이꽃

letter 1.  엄마에게 받은 아주  긴 편지

@최명순


사랑하는 딸 예지야.

새 냉장고에 삼겹살 이랑

튀김 가지고 가고 배추적은

가지고 가지마라 그리고

기지떡 가지고 갈라면

전자렌지 돌려서 가지고

가거라 녹그든 그리고

헌냉장고에 조기가지고 가고

오징어도 가지고 가려면

가지고 가고 조기 밑에

검은봉지가 오징어다

김치냉장고에 밤가지고

가려면 가지고가 포도박스에


@최명순


넣어서 들고 가든지

짐이 많은면 밤은 생략

호박은 쩌낳으니까(쪄놨으니까)

가지고 가든지 너가 있어

즐거웠다 행복해라

사랑한다 안녕

일반 냉장고 고기

아빠랑 구워서

먹어 고등어 데워서 

먹어라 


@최명순


달맛이꽃

예지 차포(차표) 끈어가(끊어 가)




2014년 여름의 일이다.

그 해 여름휴가 무렵, 

나는 갑작스럽게 수술을 하게 되었고, 자연스레 하던 일을 그만두었다.


아빠는 짐을 꾸려 내려오라고 했고,

그렇게 본가에 머물며 몇 주의 여름휴가를 보냈다.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갔고,

서울에 올라갈 날이 가까워졌을 무렵,

아빠의 성화에 못 이겨 

읍내에서 가장 용하다는 한의원에 맥을 보러 갔다.

그리고 보약을 한 재 지었다.


서울로 올라가던 날,

엄마는 기어코 남의 집 품을 팔러 갔다.

예나 지금이나 우리 집 농사일도 적은 편은 아니었는데,

 일 년 농사가 서서히 마무리되기 시작하는

 늦여름부터 첫서리가 오는 늦가을까지

엄마는 몸 한 번 제대로 놀리는 법 없이

이웃 동네로,

이웃 동네의 이웃 동네로

낡은 봉고차에 실려

오미자를, 호박을, 감을 따러 다녔다.

아빠가 말려도,

우리가 잔소리를 해도 소용없었다.


엄마는 그럴 때마다 

강철 같은 목소리를 냈으니까.


"사람은 뭐니뭐니해도 주머니에 돈이 있어야 하는 법이데이.

엄마는 매일매일 아침마다 이렇게 말한데이.

건강하게 일할 수 있는 몸을 주셔서 감사하이시더!"

 

이른 새벽녘부터 엄마의 도마는 분주했다.

일꾼들을 실어갈 봉고차가 올 시간에 맞춰 반찬을 만들어놓은 뒤  

조심스레 방문을 열었다.

그리고 내가 깰세라, 귓가에 조그맣게 속삭였다.


"예지야, 잘 가래이.

나중에 또 온네이."


새벽이슬을 맞으며 총총 떠나는 엄마의 뒷 모습을

잠이 온다는 핑계로 

서울에 간다는 핑계로 

배웅하지 못했던 일을,

 침대 맡에 놓인 석장의 편지 속, 

노란 달맞이꽃처럼 꽂혀 있던

 돈 오만 원을 보고 

깊이 후회했다.


자식은 달, 엄마는 달맞이꽃


오랜 시간이 흘러도

쉽게 바뀌지 않는,

잔인한 역할 놀이.



'명순의 레시피' 이전 글  :  https://brunch.co.kr/@anding-credit/65


https://brunch.co.kr/@anding-credit/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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