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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소찜 같은 하루

본연의 그 맛, 그 소중함.

by Ander숙

주말은 둘째의 생일이 있었다. 둘째가 좋아하는 김밥, 돈가스, 대패삼겹살, 케이크로 주말 내 배부르게 먹었더니 오늘 아침까지도 배가 고프지 않았다. 그래서 오늘 점심은 건강한 채소찜을 해 먹었다. 양배추를 한 입 쌈 크기로 자르고, 당근과 애호박도 적당한 두께로 썰어둔다. 냉장고에 있는 표고버섯과 팽이버섯도 씻은 뒤 손질하여 모두 찜기에 넣는다. 채소들을 찌는 동안 곁들여 먹을 양념도 준비한다. 마늘 3쪽을 다지고, 올리브유 1숟가락, 들기름 2숟가락, 간장 1숟가락, 그리고 알룰로스를 넣으면 좋겠지만 우리 집엔 없으니 그냥 올리고당 1숟가락. 채소들이 알맞게 잘 익으면 그릇에 담아 양념을 뿌려 맛있게 먹는다. 채소찜은 채소 본연의 맛을 느낄 수 있어 좋다. 각기 다른 채소에서 각기 다른 단맛이 느껴진다. 팽이버섯의 식감이 재밌다.


바쁜 아침에 미뤄두었던 설거지를 끝내고, 청소기를 돌린다. 회사에 출근할 때에는 평일에는 청소기를 거의 돌리지 않았다. 방바닥에 머리카락이 흩어져있어도 흐린 눈으로 모르는 척할 뿐이었다. 바닥 걸레질은 주말에만 겨우 했다. 평일에 청소라는 호사를 누리다니 기분이 좋다.


청소를 끝낸 뒤에는 쓰레기를 버리러 나갔다. 햇살 가득한 낮에 손수레에 쓰레기를 가득 싣고 나가 분리수거를 꼼꼼히 한다. 페트병에 라벨지를 벗기고 투명 페트병만 모으는 곳에 던진다. 미약하게나마 환경에 도움을 주는 일을 할 수 있어 뿌듯하다. 휴직 전에는 집에 쓰레기들을 현관 신발장 앞에 쌓아두다가 주말이 되어서야 버리러 나가곤 했다. 주말에 비라도 내리면 그마저도 하지 못했다. 비를 맞아가면서까지 버리러 가고 싶진 않았다. 그렇게 2주 치 밀린 쓰레기를 매일 아침, 저녁으로 마주칠 때마다 스트레스가 밀려오곤 했다.


집으로 돌아오자 때마침 빨래 건조기에서 노랫소리가 흘러나온다. 건조기 문을 열어 열기가 빠져나가도록 잠시 기다린다. 빨랫감을 모두 거실에 꺼내어 하나씩 차곡차곡 갠다. 이렇게 바로 건조기에서 꺼내야만 옷도 수건도도 뽀송하고 향기롭다. 그렇지 않으면 제아무리 건조기에서 뽀송하게 말린 수건이라도 쉰내가 난다. 예전에 우리 집 수건들은 늘 쉰내가 났다. 건조기에 노랫소리가 들리면 건조기 문만 겨우 열어두고 빨래를 바로 갤만큼의 에너지가 없었다.


오늘의 집안일을 끝낸 후 혼자만의 티타임을 가졌다. 가족들이 모두 나간 집에서 혼자 집안일을 하나씩 해나가면 순간순간의 소중함이 밀려온다. '그래, 내가 이러려고 휴직했었지'하며 행복해진다. 예전에는 건조기에 쌓여있는 빨래에도 쉽사리 짜증스러워졌다. 신랑에게 빨래 좀 꺼내달라며 신경질적인 말투로 명령하곤 했다. 초등학생이 된 첫째 딸이 식탁 밑에 밥을 흘리고 먹으면 깊은 한숨과 함께 제발 깨끗하게 먹으라고 혼을 냈다. 아이들과 사계절을 함께하는 비염이 머리카락과 뒤엉켜 있는 먼지 때문인 것 같아 죄책감이 들면서도 청소기 한 번 휙 돌릴 만큼 여유도 없었다. 도대체 뭐 하고 살고 있는지 혼란스러웠던 그때. 시간이 지나도 결코 미화될 수 없는 기억일 것 같다.


워킹맘은 전업맘을 부러워하고, 전업맘은 또 워킹맘을 부러워한다. 그 둘의 입장이 너무 이해가 되지만, 워킹맘으로 마라맛을 봤던 나는 지금의 채소찜 같은 하루의 가치는 값을 매길 수 없을 만큼 크다. 신랑에게 집안일에 대한 부담과 스트레스를 주지 않고, 아이들에게 건강한 식단을 챙겨 주고, 아이들이 아파도 휴가에 대한 눈치와 부담 없이 언제나 돌봐줄 수 있고, 계절에 맞는 옷을 미리 꺼내어 놓을 수 있는 지금 이 단조로움의 소중함. 그래서 자꾸만 이 인턴직 전업맘 생활이 정규직 전업맘이 되길 바라게 된다.


여전히 난 휴직이 끝난 후에 어떻게 할지에 대해 매일 고민하고 있다. 하지만 채소찜 같은 이런 하루는 오래 먹어도 질리지 않고, 이따금씩 생각나고, 많이 먹어도 부담스럽지 않은 건강하고 편안한 날들이었음이 분명하다. 내일도 굳이 사 올 것 없이 냉장고에 있는 재료들로 간단하게 건강 가득한 채소찜을 해 먹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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