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향의 발견과 발현
지난 일요일에 첫째 딸과 새를 관찰하러 갔다. 새를 좋아하는 첫째는 이날을 손꼽아가며 기다렸다. 그래서인지 어딜 가나 지각대장인 녀석이 아침부터 서두르라며 나를 닦달해댔다. 그렇게도 새가 좋을까. 무엇보다 엄마와 단둘이서 한다는 것이 이 아이를 설레게 했을 것이다.
첫째가 새를 좋아하게 된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 둘째가 태어났을 무렵, 코로나19가 우리 지역을 덮쳤다. 어린이집도 장기휴원에 들어가게 되었고 나는 집에서 꼼짝도 못 하고 신생아와 4살인 첫째를 돌보아야 했다. 아무리 내 자식이라도 그때는 그 둘을 혼자서 온종일 본다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나의 그 힘듦을 알아차린 신랑은 주말마다 첫째와 함께 버드파크로 갔다. 주말 몇 시간이라도 육아를 덜어주기 위한 배려였다. 그렇게 몇 달 동안 주말마다 새를 보러 간 아이는 거의 사육사가 되어 앵무새들을 다루었다. 첫째는 그렇게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새들을 좋아하게 되었다.
첫째가 새를 좋아하니 덩달아 둘째도 새를 좋아한다. 언니가 하는 것은 뭐든 좋아 보이는 따라쟁이다. 색깔도, 동물도, 만화도 다 언니가 좋아하는 것을 따라간다. 첫째는 자신을 따라 하는 동생을 못마땅해한다.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않나, 언니가 좋으니. 나도 어릴 때는 오빠가 하는 것은 다 좋아 보였다. 오빠랑 같이 놀기 위해 총싸움, 칼싸움은 기본이었다. 나는 바람의 검심, 나루토, 사무라이디퍼 쿄우, 더 파이팅 같은 남자들이 좋아하는 만화를 즐겨보았다. 오빠로부터 영향을 받는 것은 유년기 시절만은 아니었다. 대학교를 선택할 때도 오빠가 간 학과를 선택했다. 지독한 따라쟁이 었다. 동생의 취향이 언니의 취향에 기인하는 것은 지독한 짝사랑의 결과이다.
우리는 커플 청바지를 입고 첫째가 돌봄 교실에서 만든 바디백과 에코백을 들고 탐조모임 장소로 향했다. 날씨는 포근하고 하늘은 청명했다. 초보자이지만 새를 관찰하기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날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탐조장소는 내가 자주 다니던 강가였다. 처음에는 이런 곳에서 새를 많이 볼 수 있을까 반신반의했다. 그리고 좁은 곳에 새들이 밀집해 있는 버드파크 같은 곳에서 새를 보던 아이가 과연 광활한 자연에 드문드문 놓여있는 새들을 관찰하는 것을 잘 버틸까 걱정도 되었다. 그런데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우리가 일상에서 볼 수 있는 텃새들이 생각보다 많았고, 첫째는 관찰의 기다림을 적막을 즐길 줄 아는 아이였다.
우리는 각자의 망원경으로 멀리 있는 새를 같이 관찰했다. 새들의 작은 움직임을 숨죽여 보았다. 빛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깃털의 색에 대해 이야기했다. 물길을 따라 노니는 오리들이 왜 둘씩 짝을 지어가며 가는 것일까 상상해 보았다. 그렇게 우리는 그동안 풍경처럼 여겼던 텃새들을 마치 풀꽃처럼 자세히 보고, 오래 보았다. 그리고 나도 새가 좋아졌다. 풍경의 작은 변화를 함께 관찰하며 새들의 대화를 상상할 수 있는 첫째가 사랑스러웠다. 내가 사랑하는 아이가 좋아하는 것을 나도 좋아하게 되는 것을 자연스러운 이치이다.
우리 집 여자들은 모두 새를 좋아한다. 아마 우리 집 남자도 새를 좋아하게 될 것이다. 누가 무엇 때문에, 누구 때문에 새를 좋아하게 되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우리가 서로 닮고 싶고 함께하고 싶은 마음의 강한 알고리즘이 새를 계속해서 좋아할 수밖에 없게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