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엄마
오늘도 그리움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엄마를 떠나보내고 꼬박 5개월을 채웠다. 참 그립다.
꼭 경험해 봐야지만 알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경험하고 난 뒤에는 그것이 상상과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지를 깨닫게 될 때가 있다. 건강할 때는 내 몸에 장기가 어디에 붙어있는지도 모르고 산다. 그러다가 위염이나 위통을 앓고 나면 '아~ 위가 여기에 있었구나'하게 된다. 난 처음 코로나에 걸렸을 때 비로소 폐가 어디 있는지 알게 되었다. 감정도 그렇다. 연애를 시작하기 전에는 사랑이 무엇인지 몰랐다. 그리고 사랑에 뒤따르는 백가지 감정이 불꽃놀이처럼 터져 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아이를 낳고 나서야 그 전의 사랑은 다 거짓부렁이었음을, 아가페적 사랑이야 말로 진정한 사랑임을 알게 되었다.
엄마를 보낸 후 난 '그.리.움'을 내 마음에 꾹꾹 눌러쓰고 있다. 엄마에 관한 이야기는 좀 오랫동안 묵혀놓았다가 쓰고 싶었다. 누구나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겪게 되고, 개인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사건일지 몰라도 다른이 에게는 그다지 특별하지 않은 일 중 하나일 뿐이다. 그래서 아직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가득 찬 내가 엄마에 대한 이야기를 쓰면 읽는 누군가에게는 그저 감성팔이적인 소재의 하나로 소비될까 봐 두려웠다. 엄마를 그렇게 기록하고 싶지 않았다.
나의 엄마는 귀한 사람이었다. 참 보기 드문 사람이었다. 그렇게 위대한 엄마가 세상에 사라졌지만, 세상은 고요했다. 인생은 참 허무하다. 엄마가 있었는지도 모르게 잘만 굴러가는 세상. 그 허무함에 난 다시 글쓰기를 시작했다. 좋은 문장가가 되어 엄마를 잘 기록해두고 싶어서. 그래서 깊고 넓은 단지에 엄마를 묵혀두어야지. 그리고 푹 익은 문장으로 세상에 둘도 없던 그 사람을 기록해야지. 그렇게 마음먹었다. 아끼고 아꼈다.
그렇지만 내 마음은 엄마에 대한 그리움으로 가득 차버려서 어떤 글을 써도 결국 엄마로 귀결될 때가 많았다. 참아지지 않았다. 그래서 난 지금의 거칠고 투박한 손으로 엄마를 빚어 보기로 했다. 나중에 보면 후회로 가득 찬 글이 될지 모르지만, 25년 3월 마지막 날의 나는 엄마를 이러한 방식으로 그리워했다고 기록해 보겠다.
난 마음속에 엄마를 키우고 있다. 매일 말을 걸고 질문도 해본다. '엄마, 애들이 요즘 엄청 싸우는데 이럴 땐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냥 내려버려 둘까?' 내 맘 속에 엄마는 대답해 준다. '애들끼리 해결하게 둬야지, 엄마가 끼어들면 안 된다' 오늘은 집 근처에 새로 생긴 식당에 갔다. 쌈야채가 무한리필이 되는 대패삼겹살집인데 엄마랑 오면 참 좋을 텐데 싶었다. 나중에 엄마랑 와야지 하고 생각할 수 없음에 조금 슬퍼졌지만 그래도 맛있게 먹었다. 누군가 죽고 나면 '우리 마음속에 영원히 살아있다'라고 말을 하는데 그 말이 어떤 말인지 이제야 알겠다.
엄마는 나의 노스탤지어다. '노스탤지어'도 이제야 가슴에 아로새길 수 있는 단어이다. 엄마의 젖냄새. 온기 가득했던 손가락. 깊이 생각하는 눈동자. 조금 거친 음성에 다정한 말투. 모두 사무치게 그리운 나의 영원한 고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