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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동안 쓰는 일기

책상 위의 풍경

by Ander숙

연초부터 수없이 고민하다가 결국 '5년 일기장'을 사고야 말았다. 그것도 3월의 끝 무렵에.


마트에서 다 먹지도 못할 음식을 산다던가, 마음에 꼭 들어 산 옷이지만 어쩐지 손이 자주 가질 않아 옷장 구석으로 방치해 두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이런 식의 돈낭비를 하지 않겠다는 결연한 다짐과는 반대로 자꾸만 너무 많이 사거나 충동적으로 사거나 하곤 한다.


그런데 이상하게 일기장 앞에서는 수많은 검열을 거치고 또 거친다. 정말 매일 쓸 수 있을까? 그럴 리가 없지. 그럼 일주일에 몇 번 정도는 쓸까? 한 달도 채 쓰지 못하고 올해를 넘겨버리는 건 아닐까? 사고 싶다는 마음 앞에서 사면 안 되는 이유만을 늘어놓아 본다.


이렇게도 일기장에 마음을 인색하게 쓰는 이유는 일기장이기 때문이다.

일기에는 마음을 눌러 적는다. 지극히 개인적인 나의 일상과 지극히 주관적인 나의 생각이 담겨있는 이것을 탄생시켜도 되는지가 망설여진다. 끝까지, 꾸준히 쓰지 못한 일기장. 365일 중 30일도 채 쓰지 못한 일기장은 애매하다. 그냥 버리자니 30일이 적힌 내 마음이 아쉽고, 간직하자니 335일이 부피가 거추장스럽다. 그래서 애당초 이런 것을 만들지 않기로 그렇게 마음먹었었다. 어차피 오래 쓰지도 못할 텐데 뭐. 하면서 말이다.


그런데도 이상하게도 '5년 동안 쓰는' 일기장에는 자꾸만 마음이 흔들렸다. 1년짜리 일기장보다 당연히 크고 두껍다. 가격도 조금 더 비싸다. 겉표지는 매우 실용적이다. 5년 동안 보아야 할 물건이니 유행 타지 않는 평범 of 평범한 디자인이다. 속지는 더욱 실용적이다. 달력도, 계획표도 없고 오로지 매일의 일기만 기록할 수 있다. 눈에 보이는 것들은 크게 매력적이지 않지만, '5년 동안'쓴다는 것 자체가 매우 끌렸다. 5년 전 오늘의 나는 어떤 일상을 살고, 어떤 고민을 하고, 어떤 기분으로 살았는지를 알 수 있다니. 그저 흘러가는 매일의 일상이 100자도 안 되는 글자로 기록되었을 때, 5년 후 나는 과거의 나를 통해 무언가를 배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무엇보다 5년 뒤의 내가 기대되었기 때문이었으니라. 난 지금 변화에 매우 몰두해 있고, 이런 도전에 대한 갈망과 노력은 더 나은 미래를 꿈꾸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 내디딘 한 걸음, 한 걸음으로 5년 뒤에는 꽤 다른 곳에 가있기를 희망하고 있다. 그래서 결국 이 일기장을 사게 된 것이다.


3월 31일 첫 일기를 썼다. 올해의 4분의 1이나 지난 시점이지만 5년이라는 시간을 놓고 보았을 때는 그렇게 긴 시간도 아니었다. 그리고 오늘까지 매일 쓰진 못했다. 너무 바쁜 날, 피곤한 날은 건너뛰기도 했다. 어떤 날은 밀린 방학 숙제를 하는 아이처럼 2~3일 치의 일기를 사건 위주로 적어놓기 바쁜 날도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나에게 크게 실망하진 않았다. 아직까지는 일기장이 내 기분을 설레게 한다. 2029년 3월 31일에 다다랐을 때, 나는 어떤 모습으로 어떤 이야기를 지니고 이 일기장을 펼쳐보게 될지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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