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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ucingRan Mar 17. 2022

043. 흉터

내몸탐구생활



043. 흉터


몸 이곳저곳 오래된 흉터가 있다. 오른쪽 눈가에 남은 바늘 자국, 오른쪽 아랫배에 남은 2개의 수술 자국, 오른쪽 손에 남은 칼자국, 오른쪽 정강이에 남은 패인 자국. 어쩌다 보니 오른쪽에 상처와 흉터가 많이 남았다. 물론 왼쪽에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유난히 오른쪽에 많다.


이제는 기억나지 않지만 동생이 던진 쇠병따개에 맞아 피가 철철 났다고, 그래서 너무 놀랐고 무서웠다고 사촌 오빠와 언니가 말했다. 내 나이 4살 무렵이었다. 조금 더 옆으로 맞았으면 실명했을 거라 했다. 6살 때쯤에는 밖에서 놀다가 동생이 나를 밀쳐서 넘어졌고, 쌓여있던 뾰족한 자갈에 배가 찢어졌다고 아빠가 말했다. 이것 역시 기억나지 않는다. 오른쪽 눈과 아랫배에 남은 흉터는 같은 병원에서 꿰맨 게 아니었을까 추측해 본다. 그 동네에서 20대 후반에 2년 정도 살았는데, 발목을 다쳐서 방문했던 근처 정형외과에서 10년도 더 된 진료기록이 있다며 신기해했다. 어릴 때부터 오며 가며 봐왔던 아주 오래된 병원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뛰면서 스트레스를 풀었다. 옥상에서 혼자 뛰면서 뱅뱅 돌다가 할머니의 텃밭 근처의 흙을 밟고 미끄러졌다. 넘어지면서 양쪽 무릎이 제대로 깨졌다. 바닥에 쓸려서 상처가 깊었다. 피가 많이 났고, 매우 아팠다. 할머니는 그것 가지고 엄살을 부리냐고 했다. 네가 뛰다가 넘어졌으니 네가 자초한 일이라고 덧붙였다. 엉엉 더 큰 소리를 내며 울었다. 할머니는 많이 아프지 않으니 저렇게 크게 울 수 있는 거라고, 시끄럽다고 소리를 질렀다. 나는 눈물을 닦기도 전에 피와 진물이 나는 상처에 과산화수소수를 들이붓고, 하얗게 올라오던 것들을 닦아냈다. 그 이후로 아파도 잘 울지 않았다. 잘 참는다는 소리도 듣기 시작했다. 아주 오랫동안 소리 내어 울지 못 했다. 그때 나는 11살이었다.


숨겨둔 용돈을 내가 훔쳤다고 동생이 소리를 지르며 울었다. 할머니는 부엌 싱크대 앞에서 내 손등을 잡고 식칼을 내리찍었다. 손을 확 빼는데 손가락 위에 칼날이 꽂혔다. 벌어진 상처 사이로 피가 새어 나오기도 전에 뼈인지 힘줄인지 허옇게 뭔가 보였다. 이건 또렷이 기억난다. 할머니는 놀라지 않았다. 아직 담배를 피우던 할머니가 재떨이에서 담배꽁초 몇 개를 집어서 필터를 찢었다. 피가 나는 상처 위에 그것들을 올렸던 것도 생생하다. 그 시기에 내게 도벽이 있었다. 할머니가 식칼을 들었던 이유이기도 했다. 사라졌던 동생의 용돈은 며칠 후에 동생이 숨겨뒀던 책 속에서 나왔다. 할머니도 동생도 내게 사과하지 않았다. 훔치는 행위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자연스레 사라졌지만, 사별의 이른 경험과 그로 인한 스트레스, 학대받았던 어린 시절에 차곡차곡 쌓인 정서적 불안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걸 20대 초반에 심리학 공부를 하며 알게 됐다.


어느 일요일이었다. 교회를 가야 하는데 새벽부터 아랫배가 아팠다. 할머니는 대수롭지 않게 환으로 된 소화제를 주면서 교회를 보냈다. 하루 종일 쿡쿡 바늘로 찌르는 듯이 아팠다. 그러다가도 화장실에 가면 또 괜찮아지기도 했다. 오후부터는 통증이 계속됐다. 저녁까지 까무러치며 아파하는 나를 보고 그제야 병원에 데려갔다. 만성 맹장이었다. 기대했던 교회 수련회 가는 날, 이른 아침에 맹장 수술을 했다. 그대로 다음날 아침에 수련회를 갔다면 터졌을 거라고 늙은 남자 의사가 겁을 줬다. 중등부에서 처음 가는 수련회였다.


대학로에서 친구들과 맛있는 저녁을 먹고 헤어지며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데, 횡단보도 앞에 서있는 쇠기둥을 미처 보지 못했다. 그대로 정강이가 기둥에 부딪쳤다. 많이 아팠는데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통증을 참으며 집에 왔다. 청바지를 벗는데 살갗에 붙어 바지가 벗겨지지 않았다. 상처가 깊게 파였고, 피는 청바지에 이미 말라 붙었고, 뼈가 살짝 보였다. 병원에 가지 않았고 그 상처는 그대로 움푹 파인 흉터로 남았다.


가끔씩 흉터로 남은 상처의 자국들을 한 번씩 만져 본다. 이제는 통증도 없고, 흘러온 시간에 맞춰 많이 옅어졌다. 하지만 그 흉터가 생겼던 그때의 그 공기, 그 말들과 시간이 지날수록 더 밀려오던 통증, 참아냈던 기억들이 모두 고스란히 되살아날 때가 있다. 파도처럼 갑자기 밀려왔다 또 썰물처럼 희미하게 사라지는 기억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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