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5. 짧은 손가락

내몸탐구생활

by maybe



045. 짧은 손가락


내 손가락이 짧다는 사실을 깨달은 건 매번 악기를 배울 때였다. 글보다 피아노를 먼저 배웠다고 아빠가 그랬다. 장래희망을 가진 초등학생일 때 피아노가 1순위였다. 그러니까 피아노를 치는 것만이 전부였기 때문에 피아니스트를 꿈꿨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피아노의 건반이 무겁게 느껴졌다. 10개의 손가락을 부지런히 움직여도 점점 더 다른 친구들보다 진도가 뒤쳐졌다. 그러면서 피아노가 더 이상 재밌지 않았다. 건반을 치는 것이 즐겁지 않았다. 피아노가 버겁다 느껴질 때 멀어졌다. 멀어졌다 해도 몇 년은 피아노 근처를 서성거렸다. 피아노 뚜껑을 열어보지도 않으면서 고등학교 갈 때까지 고집스럽게 내 방에 두었다. 종종 교회에서 피아노 앞에 앉았을 때 그리웠지만 여전히 즐겁지 않았다. 20대 중반쯤이었나, 갑자기 피아노를 치고 싶었다. 사촌동생의 피아노 앞에 앉아 건반 위에 손가락을 올려보며 깨달았다. 그러니까 10여 년 만에 손가락이 짧다는 걸 알게 됐다. 다음에는 플룻, 다음에는 베이스 기타, 그다음은 클래식 기타였다. 10대, 20대, 30대를 나란히 관통했던 악기들. 나도 안다. 짧은 손가락을 핑계로 금방 포기했던 나의 안일함과 불성실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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