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 고양이
언제인가부터 고양이를 사랑하게 되었다. 처음을 떠올리는 게 어려울 정도로 오래되었다. 꼬꼬마 때부터 눈꼬리가 올라간 ‘고양이 상’이라는 말을 많이 들어서 고양이를 유심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관심이 생기면 관찰하게 되고, 그렇게 자꾸 눈에 담으면 마음에도 담기게 마련이다. 시기 별로 나는 큰 동물을 좋아했는데, 호랑이가 고양잇과 동물이라는 걸 알고는 더욱 흥미로웠다.
그래도 유난히 각인이 되었던 것은 역시 뮤지컬 ‘캣츠’의 영향이 컸다. 캣츠의 포스터는 지금 봐도 정말 잘 만들었다. 누군가는 그런 고양이의 눈이 무섭다고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았다. 이 포스터와 뮤지컬을 접한 그날부터 검은색 고양이는 내게 가장 섹시한 동물이 되었다. 지금도 여전히 그 생각은 변함이 없다.
고양이를 반려하는 사람을 처음 경험했던 건 12살쯤이었다. 그때 우리 집은 마당이 있는 단독 주택이었는데, 안쪽 방에 세 들어 사는 20대 언니가 고양이를 키웠다. 지금 떠올려 보면 이름은 모르지만, 얼핏 기억나는 건 흔히 볼 수 있는 고등어 무늬의 ‘코숏’이었다. 언젠가 언니가 만져보라고 해서 처음으로 귀와 귀 사이를 건드려 보았고, 언니가 고양이를 안겨주어 엉겁결에 들고 있었다. 얼어 있는 내 품에서 그르릉 거리는 소리도 들었던 것 같다. 낮게 울리는 진동이 닿아있던 내 몸에도 느껴졌으니까. 길에 사는 고양이는 ‘도둑’이라고 냉대하고, 집집마다 마당에 진돗개만 잔뜩 키우던 시절이었다. 우리 집에도 옆집에도 마당에 진돗개가 있었다. 내게는 꽤 쇼크였다. 언니와 함께 살던 고양이는 생각보다 작았고, 따뜻했고, 상냥했다.
20대 초반에 거의 매일 붙어살았던 친한 친구의 집에도 ‘나비’라는 고양이가 있었다. 어릴 때 만났던 언니네 집에 있던 고양이와 같은 짙은 색의 고등어 태비였다. 유난히 겁이 많고 까칠했던 암컷이었는데, 아삭 거리는 상추를 좋아했다. 어딘가 숨어 있다가도 싱싱한 상추를 들고 흔들면 나타나고는 했다. 친구 집에서 나와 고양이가 둘만 있던 날도 많았는데, 혼자 달리다가 넘어지기도 하고,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그루밍을 하는 모습을 자주 목격했다. 그러면서 나비는 사람들이 모이면 정색하고 화를 냈다. 그 모습이 웃기고 또 귀여웠다.
나도 고양이와 잠깐 살았다. 노오란 치즈 태비 무늬를 가진 수컷 아기 고양이였다. 위에 언급한 친구가 겨울에 길에서 주워왔다. 아무리 기다려도 어미가 나타나지 않았고, 아이는 애처롭게 울고만 있었다고, 도무지 모른 체 할 수 없었다고. 친구네 집에는 이미 예민한 고양이가 있었고, 부친이 심하게 반대를 했기에 당시 집에서만 생활하던 내게로 왔다. ‘빵빠레 바닐라’ 박스에 담겨와서 ‘바닐라’라고 불렀다. 질병과 우울감에 시달렸던 시절이었다. 그 자그마한 고양이가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었나. 지금 생각해보면 바닐라를 잠깐 임보 했던 그 시기가 없었더라면 삭막한 삶이 더 오래 지속되었을 것 같다. 슈바이처 선생님도 말씀하지 않았는가. 비참한 삶에서 벗어나려면 음악과 고양이가 있어야 한다고.
현재 내 주변 지인들은 개보다 고양이와 반려하는 사람이 더 많다. 어떤 소셜 미디어를 들어가든 고양이 영상과 사진은 넘쳐난다. 유튜브를 잘 챙겨보지 않는 나도 팔로잉해둔 채널의 대부분은 모두 고양이가 나온다. 고양이의 귀여움과 그 매력을 이제 너무 많은 사람들이 알아 버렸다. 기분이 좋든 싫든 고양이를 보면 어김없이 행복해진다. 역시, 고양이가 사람을 구하고 세상을 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