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8. 책
오늘이 지나니 또 다섯 줄이 추가되었다. 읽어야 할, 읽고 싶은, 그리고 사고 싶은 책 리스트가 매일 늘어난다. 최근 몇 주 동안 추가된 리스트만 50권이 넘는다. 시간과 돈은 한정적인데 사람의 욕심은 시간을 망각하고, 급여를 받으면 또 탕진하기 마련인 것이다. 그래서 리스트에서 사라지는 것보다 늘어나는 게 더 많은 게 흠이라면 흠이다. 가끔 생각한다. 죽기 전에 모두 읽을 수나 있을까.
누가 읽으라고 강요했던 건 아니었는데, 미취학 아동일 때부터 유난히 읽는 것이 좋았다. 그러다 보니 책을 접할 기회가 많았고, 어느덧 책을 향한 짝사랑과 집착이 생겼다. 숫자로 목표를 잡고 닥치는 대로 읽는다던지, 어렵고 난해한 책들을 읽으며 자기만족을 한다던지, 또 읽지도 못할 책들을 마구 사서 쌓아둔다던지 하는 것들이 대표적인 사례다.
내가 초등학교를 다닐 때 학교 앞에는 아이들을 상대로 뭔가를 팔아보려는 장사꾼들이 많았는데, 병아리보다 책을 파는 이들이 많았다. 그들은 얼마나 말솜씨가 현란한 지 당장이라도 사야 할 것만 같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영업하는 사람들이니 말하는 스킬은 당연한 일이겠지만, 사리분별 안 되는 어린애가 그런 어른들을 당해 내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더군다나 나는 책에 집착이 있는 아이였으니 더 쉽게 넘어갔을 것이다. 무슨 세계 명작 전집과 위인전집 시리즈로 대략 500권이 넘었던 걸로 기억한다. 책 팔이 아저씨는 신이 나서 당시 살던 집까지 나를 데려다주면서 거실에 무거운 박스를 여러 개 내려두고 갔다.
왜 그런 날에는 집에 아무도 없는 걸까. 항상 집에 있던 조모가 하필 그날 외출 후 귀가가 늦었다. 집안에 어른이 없으니 박스를 신나게 풀어 책을 모두 꺼내어 읽기도 하고, 만져보기도 하고, 안아보기도 했다. 조모가 돌아온 후에는 뭐,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상황이 벌어졌다. 조모는 내게 소리를 지르며 혼을 냈고, 요즘 흔히 말하는 ‘등짝 스매싱‘을 여러 번 맞았다. 퇴근 후 돌아온 아빠는 엉엉 울다 잠든 나를 깨워 물었다. 책이 그렇게 좋으냐고.
그 전집은 결국 내 소유가 되었다. 당시 살던 집의 거실에는 붙박이 책장이 있었고, 고스란히 모두 책장에 꽂혔다. 전부 읽지는 못했다. 10번 읽은 책도 있었고, 읽다 만 책도 있었고, 한 번도 읽지 않은 책도 있었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관심사가 넓어지면서 멀어지게 됐지만, 그래도 80% 이상은 읽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후 이사를 여러 번 다니면서 짐이 되어버린 책들을 몇 차례 나눠 모두 처분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때 읽었던 그 책들의 내용은 대체 어디로 갔을까?
대부분의 기억은 휘발되어 생각나지 않는데, 그때의 기억이 뚜렷이 남아있는 걸 보면 큰 사건이었던 것은 틀림없다. 그 영향이었던 걸까? 20대가 되어 돈을 벌기 시작하면서부터 책부터 엄청나게 사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지치지 않고, 질리지 않고 여전히 사들이는 게 책이다. 읽어서 알아가는 재미도, 읽어서 리스트를 지우는 재미도 여전하지만, 이제는 대부분 소유한다는 만족과 소비하는 재미로 계속 책을 사게 되는 것 같다. 이 세상에서 종이가 사라지지 않는 한 책은 계속 나올 거고, 나는 계속 살 것이다. 이제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어쩔 수 없지 뭐, 이게 내 취향이고 내 모습인 걸. 그나마 닥치는 대로 부지런히 읽어대던 10대 때 읽은 책들이 어떻게든 내 안에 남아 어휘가 되고, 생각이 되고, 말이나 글이 되어 주었다는 걸 안다. 훌륭하지 않아도 덕분에 부족하거나 모자라지는 않았다. 다행이지 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