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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ucingRan May 12. 2022

099. 드레스코드는 보라색

내몸탐구생활



099. 드레스코드는 보라색


아빠는 종종 말했다. 아빠가 죽으면 엄마 묘를 정리해서 같이 화장해 달라고. 아빠한테 그럼 수목장은 어떻냐 했더니, "그건 너네 마음이지. 아빠는 이미 죽었는데 너네가 편한 대로 알아서 해야지."란다. 여기서 '너네'는 나와 동생이다. 어쨌든 남겨진 자식들이 부모의 죽음 이후를 기리게 될 테니 남은 '너네'들이 알아서 하라고. 아빠와 이런 대화를 나눈 후 그럼 나의 죽음 이후는 어떻게 될까, 생각해 봤다. 나는 아이를 낳을 계획이 없으니 남겨진 자식도 없고, 나의 생을 마무리해줄 이가 있을까. 기꺼이 그렇게 해줄 이는 누구인가. 짝꿍보다 내가 먼저 간다면 짝꿍에게, 짝꿍이 없다면 내 절친 썬에게. 만약 절친이 먼저 갔다면, 그러면 누구에게. 여기까지 생각해보니 사뭇 진지해졌다. 그렇다면 수아에게 부탁을 해볼까. 이제 중학생이 되는 조카에게 미래의 늙은 이모의 마무리를 부탁하려고 하니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유언이나 유서로 꼭 남겨둬야지, 다짐했다.


언젠가 어떤 이들과 우연히 '나의 장례식'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누군가는 하고 싶은 말들을 녹음해서 들려주고 싶다고 했고, 누군가는 본인이 좋아했던 음악을 틀어두고 싶다고 했다. 나는 내가 보라색을 무척 좋아하니까, 나를 기억하고 기념하는 의미로 드레스코드는 보라색으로 맞췄으면 좋겠다고 했다. 보라색 옷이든, 우산이든, 양말이든, 가방이든 상관없었다. 진한 보라색이든, 연한 보라색이든 관계없이 이런저런 보라색 아이템을 들고 모두 모여 맛있는 음식과 술을 마시며 웃고 즐기다 갔으면 좋겠다고. 슬픈 장례식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여기까지 말하는데 갑자기 누군가 말했다. 저 보라색 모자 있어요. 듣고 있던 모든 이들이 동시에 웃었다. 나도 웃으며 말했다. 네, 꼭 그 보라색 모자 쓰고 제 장례식에 와 주세요. 무척 기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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