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야, 간다 (2)
나의 첫 장래희망은 양궁선수였다. 스포츠를 좋아하는 부모님 사이에 태어난 둘째 딸이었던 나는 하계/동계 올림픽이나 월드컵 등 국제적인 큰 경기가 있을 때 TV가 꺼지지 않는 집에서 성장했고 자연스럽게 스포츠를 언제부터 좋아했을지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그야말로 유아세례 수준으로 뼛속부터 스포츠 덕후(이하 스덕)가 될 운명이었다. 1984년 LA 올림픽이 한창이던 때, 서울 단칸방에서 엄마와 양궁 중계를 보고 있던 나는 서향순 선수가 날린 화살이 가운데 ‘텐’을 찍는 그 순간! 그 찰나의 순간이 아마 나를 본격적으로 스덕의 길로 걷게 했다. 불과 네 살의 나이. 대부분의 기억이 사라지거나 흐릿하지만 그 순간의 임팩트는 아직도 생생하다.
1986년 아시안게임을 거쳐 1988년 전국을 그야말로 들썩이게 했던 서울올림픽. 아빠의 전근으로 인해 부산에 살고 있던 나는 현정화-유남규 복식조의 플레이를 보며 탁구선수를 꿈꾸기 시작했다. 당시 체구가 작았고 순발력이 좋았던 나에게 시범으로 몇 번 탁구를 시켜 본 엄마는 ‘이거 되겠다’ 싶으셨는지 부산 시내에 탁구하는 국민학교들을 열심히 알아보셨다. 하지만 아빠가 대구로 발령받으시고 전학 후 학교에 한동안 적응하지 못 해 눈물로 나날을 보내면서 탁구선수는커녕 학교생활에 헉헉대던 나에겐 자연스럽게 없던 일이 되었고, 이후 나는 글쓰는 일과 경기 분석에 특히 관심 갖게 되면서 학교에서 방송부를 했던 중학교 시절부터는 여성 캐스터와 스포츠 기자라는 직업을 구체적으로 준비하기 시작했다.
인생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미 십 대 시절부터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입시 준비 중에 몸이 크게 아프면서 열심히 준비했던 외고 입시(외고도 가고 싶었지만 일찍 출가하고 싶은 욕망이 컸다)를 접었다. 성적도 체력도 충분히 합격선이었던 해군사관학교 입시에서는 멀리 진해까지 가서 신체검사를 받다가 이빨 부정교합(이빨이 어느 정도 맞아야 잠수함을 탄다나 뭐라나...)이 심하다고 불합격 판정을 받은 뒤 그 자리에서 기절해 실려 갔다가 혼자 돌아오는 5시간 내내 대성통곡했던 실패의 경험을 쓰라리게 맛 봤다. IMF 경제한파의 여파로 인해 엄마는 장학금 받으며 교대를 다니며 졸업한 후 자신처럼 초등학교 교사의 길을 걷기 바라셨지만 당시도 그렇고 지금도 누군가를 ‘가르친다’라는 행위가 나에게 맞지 않다 생각했던 나는 결국 엄마와의 의견 조율에 실패했고 결국 몰래 특차원서(특차에 합격하면 정시를 쓸 수 없고 특차합격 학교를 가거나 재수를 하거나 선택지가 둘 뿐임)를 써서 나도, 엄마도, 학교도 만족하지 못 하는 수준의 학교로 진학했다. 아나운서와 기자, 라디오 PD, 카메라맨... 꿈꾸던 직업에 맞게 신문방송학과로 갔지만 훨씬 넓은 사회생활을 하다 보니 문화사회학을 공부하고 싶어졌고 유학이나 대학원을 가려니 세부 전공을 정하기에 범위가 넓어서 문화현장을 먼저 뛰어보자, 라는 생각이 들어 다니던 학교를 과감히 접고 문화예술인으로서의 필드 생활을 시작했다. 나이 스물 둘이었다.
전공이 신문방송이다보니 홍보팀 업무로 각종 공연축제 현장에서 일했다. 운 좋게 잘 봐 주신 분들이 많아서 진급도 빨랐고 행사에 맞춰 보통 길면 6개월, 짧게는 1개월 근무하는 이 직종에서 다행히 쉬는 날이 별로 없을 정도로 일을 할 수 있었다. 공연축제의 특성상 생동감이 넘치고 특히 축제 당일에 현장에서 글이나 영상으로 보던 공연이 실제로 내 눈 앞에서 구현되는 걸 보면 너무 매력적이었고 현생의 생사고락을 모두 잊을 수 있었다. 잠깐 만나 숨 가쁘게 일하고 헤어지는 많은 사람들도 매력이었다.
하지만 문화예술 현장은 (지금은 많이 좋아졌지만) 근무환경이 다른 직종에 비해 좋은 편은 아니다. 돌발 상황이 많다보니 계획한대로 스케줄이 이뤄지지 않을 때가 많다보니 일단 식사를 제 때 먹을 수 없었고 식사도 먹는 둥 마는 둥 빨리 먹거나 긴장이 되어서 거를 때가 많았다. 게다가 흡연을 심지어 사람 면전이나 밥 먹고 있는 바로 옆에서 하는 분들도 많았는데 문화예술 현장의 특성상 군대와는 또 다른 위계 문화가 있어 나처럼 어린 여성이 불만을 이야기 하는 게 쉽지 않았다. (그래서 진급하고 나서는 적극적으로 어린 + 직급이 낮은 + 비여성의 입장에서 근무환경을 고치려고 쓴 소리를 많이 했다) 뒷풀이는 필수였고 안 먹고 가면 뒤에서 뒷담화 하기가 일쑤였다. 그런 생활이 맞지 않으면서도 당시엔 다 따라잡을 수 있었던 건 그만큼 그 일들이 좋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영화제와 영화현장까지 10여 년을 문화예술 현장에서 일한 후 분야를 바꾸고 귀촌을 하고 나니 온 몸에 아픈 곳들이 징후를 보이고 심각해지기 시작했다. 일하면서도 안 좋았던 부위였던 갑상선과 허리부터 시작해 여기저기가 아프다고 울었다. 집 앞 강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왜일까. 내 몸은 왜 갑자기 울고 있을까.
그래도 한편은 다행이라 생각했다. 도시에서 계속 바쁜 생활을 했더라면, 문화예술 현장에서 계속 일했더라면 나는 내 몸과 마음이 아프다고 우는 걸 듣지 못 하고 조용히 죽어 갔을 지도 모른다. 현실을 받아들이고 더 늦기 전에 그동안 수고해 온 내 몸과 마음을 사랑해 주기로 했다. 그래서 2019년부터 지금까지 아픈 곳들이 나타날 때마다 쓰다듬어 주며 나 자신을 돌아보고 치료에 전념하고 있다.
몸 건강해 지면 꼭 놀러 와요!
타지에 사는 벗의 안부 말에 나는 말했다.
이제 글렀어요! 더 늦기 전에 얼굴 보러 갈게요-
열정이 넘쳐서 주 7일을 거의 밤샘하다시피 일하던 20대 시절 나의 별명은 ‘마징가 Z’. 이제 마징가는 녹이 슬어 낑낑- 대고 있지만 화려했던 청춘의 그 시절이 가져다 준 경험과 사람들, 추억과 내공을 안고 버텨 나간다. 다시 돌아가도 그렇게 살았을 내 청춘도 소중한 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