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그때 그 장면에서 그들이 마시던 것
돌이켜 보면 은근히 영화에서도 와인이 많이 등장합니다. 영화의 줄거리에 집중하느라 몰랐던 장면들. 같이 보실까요?
런던 증권가의 잘 나가는 펀드 매니저인 맥스(러셀 크로우 역)가 어느 날 삼촌이 돌아가시면서 남긴 포도밭과 와이너리 때문에 프로방스로 가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 영화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배우인 마리옹 코띠아르도 나오는데요. 영화에서 맥스가 어렸을 때를 회상하는 장면에서 삼촌이 보여주는 와인이 프로방스의 여러 와인 생산지 중 하나인 반돌(Bandol)의 도멘 템피에르(Domaine Tempier)의 와인입니다. 기원전 500년에 소아시아에 있던 고대의 항구도시인 포카이아 사람들이 반돌에 자리 잡으면서 와인 생산을 위한 포도밭을 일구기 시작했고, 몇백 년 후 로마인들이 이 반돌 지역의 와인을 수출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1941년에 AOC 반돌로 정식 등록되죠. 도멘 템피에르의 와인 양조 역사는 루이 15세 왕정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며, 1885년에 와인 콩쿠르에서 첫 금메달을 따며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곳입니다.
제가 마셔본 Domaine Tempier의 와인 중에서는, Bandol Cuvée Cabassaour가 좋았습니다.
포도나무 연령대 최소 60년 이상인 것으로 수확하여 만드는 와인으로, 무베드르 품종을 메인으로 하여 (92에서 94%) 쉬라즈와 생소를 조금 섞어서 빚어냅니다. 손으로 직접 포도송이를 따내고, 이파리와 줄기를 모두 제거한 후 천연 효모를 넣고 콘크리트 통에서 3~4주 정도 발효시킵니다. 병입 전 오크통에서 18개월 정도 숙성됩니다. 최신 빈티지를 마시는 것보다는 적어도 3~4년 이전 빈티지를 드시는 게 좋더라고요. 굉장히 깊고 짙은 레드 색조로, 빈티지가 아직 영할 때는 아로마가 은은한 편입니다. 오래 킵할수록 제비꽃, 가죽, 블랙베리 등의 아로마가 풍성해집니다. 탄닌이 부드러우면서도 균형이 잘 잡혀 있으며, 10년 이상 보관 가능합니다.
와인을 배경으로 한 영화를 고른다면 이보다 더 적격인 영화도 없을 거 같아요. 영화의 시작부터 포도송이를 배경으로 하며, 포도밭, 포도 수확 및 포도밭을 거니는 장면을 포함 와인에 관한 모든 것이 나오는 영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까요. 나파, 세인트 헬레나, 소노마 밸리 등 산등성이에 펼쳐져 있는 와이너리를 배경으로 하며, 영화 속 와이너리 이름은 '구름'이라는 뜻을 가진 라스 누베스입니다. 구름 위의 산책이라는 영화 제목도 여기서 따온 거 같아요. 지금의 나파 밸리라면 상상할 수도 없는 전통적인 방식 그대로 와인을 빚어내는 걸 보는 재미가 있습니다. 아무래도 배경이 2차 세계대전 이후라서 가능한 거 같아요.
서리 피해를 막기 위해 사람들이 천사의 날개 모양을 달고, 포도밭에 스토브의 열기를 보내는 이 장면 다들 기억하시죠? 이 영화를 안 보신 분들도 이 장면은 대부분 아시더라고요.
큰 통 속에서 여인들이 신나게 포도를 으깨는 모습은 어떻고요. 물론 지금에 와서는 모두 현대적인 시설로 대체되어서 와이너리에서는 가끔 이벤트성으로 하는 행사에 불과하지만, 포도를 직접 발로 으깨는 과정은 천 년 넘게 이어져 온 방식입니다. 직접 해본 경험으로 말씀드리자면 사실 발로 포도를 직접 으깨는 과정은 의외로 재미있어요! 그리고 사람의 발은 기계처럼 딱딱하지도 않고, 자연스러운 굴곡이 있는 데다 체중에 한계가 있어서, 포도를 밟아 으깨도 포도 씨가 산산조각이 나는 일이 드물죠. 그리고 포도 상태를 봐서 적당하다 싶으면 바로 멈출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 외에 포도를 수레에 싣는 장면이나, 와인 꺄브 및 와인 축제 장면도 눈요기 거리로 충분하죠.
영화 촬영 장소 중 하나인 마야카마스(Mayacamas)의 와인을 추천해볼게요.
생산지는 Mount Veeder, 대문자 M의 로고가 인상적인 와인이죠. 아래 링크를 클릭하면 생산자인 Braiden Albrecht와 Andy Erickson가 소개하는 걸 들을 수 있습니다.
와인의 완성도는 뛰어나지만, 개인적으로 선호하는 스타일은 아닙니다. 까치밥나무, 블랙 체리, 참나무, 바닐라, 가죽, 담배, 흑연 등의 아로마가 조화를 이루는 스타일로, 입안에서 격정을 일으키는 듯한 파워풀하고 스파이시한 와인이에요. 전형적인 나파밸리 스타일 카베르네 소비뇽이기도 하고요. 2020년을 기준으로 2014년이나 2015년 빈티지를 골라서 2시간 전에 오픈 후 드시면 좋을 거 같아요. 같은 와이너리의 메를로도 괜찮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와인 애호가라면 누구나 아실 만한 영화, Sideways로 이어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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