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랑 끝에 서 본 적이 있는가?
벼랑이라고 해서,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는, 낭떠러지만 말하는 게 아니다. 건물 옥상이나 높은 곳도 포함된다. 한발만 더 내밀면, 발이 디딜 곳이 없는 곳을 벼랑 끝이라고 표현한다. 떨어질 수 있고, 떨어지면 다음은 없는 그런 곳 말이다. 아래를 내려다보면, 오금이 저리고 머리끝이 삐쭉삐쭉 선다. 높은 건물 옥상이나 중앙이 텅 빈 건물 위 혹은 산 정상에서, 바닥을 내려다보면 이런 느낌을 받는다.
처음, 이 느낌을 맞이한 건 초등학생 때였다.
단독 주택에 살고 있었다. 무슨 일인지 기억나진 않는데, 엄마한테 혼나서 옥상에 올라갔다. 순간 ‘뛰어버릴까?’ 하는 충동이 일었다. 한 발을 옥상 턱에 걸치고, 밑을 내려다보는데 아찔했다. 순간 올라왔던 충동이 깔끔하게 사라졌다. 관광지에 가면 높은 곳에 길이 있고, 바닥이 보이게 한 곳이 있다. 밑을 내려다보면 아찔하다. 군대에서도 이런 경험이 있다. 유격 훈련 때 헬기 레펠에서였다. 공중에서, 머리를 아래로 향한 상태로 줄 타고 내려오는 거다. 내려오기 전까지는 아찔한데, 내려올 때는 짜릿하다. 아찔함과 짜릿함의 느낌은 다르지만, 한 끗 차이다. 이 둘의 느낌을 가르는 건, 전과 후다.
삶에서도 벼랑 끝에 선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더는 앞이 보이지 않고, 내디딜 곳이 보이지 않는다. 시간의 문제지, 조금만 있으면 떨어질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더는 방법이 없을 것 같아 망막하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다는 생각이 든다. 선처를 기다리는 아이처럼, 그저 기다릴 뿐이다. 어떻게 됐을까? 선처를 잘 받았으니, 지금 이렇게 글을 쓰고 있지 않나 싶다. 상황이 있을 때마다, 희한하게 방법이 생겼다. 지인의 도움이 있었고, 은행의 도움이 있었다. 정책도 한 몫했다.
집을 마련한 것을 예로 들면 그렇다.
결혼하고 독립하고 싶었는데, 자금이 없었다. 지인에게 하소연했는데, 지인이 빌려줘서 전세를 마련할 수 있었다. 몇 년이 지나고, 전세로 2년마다 거처를 옮겨야 했을 때, 더는 옮기기 싫어 자가를 마련하고 싶었다. 자금은커녕 빚만 있는 상태였다. 지인의 권유로 자가를 알아봤고, 자금도 빌렸다. 이때도 우여곡절이 있었다. 빌려주기로 한 지인이 계약 기간에 맞춰주기 어려웠는데, 마침 친구가 빌려줘서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여기에 더해, 은행 대출 규제가 심하지 않았다. 지금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비율이었다. 받을 수 있는 최대를 받았다. 집값보다 대출이 더 많았으니 말 다 하지 않았나? 자가를 마련하고 몇 년 동안은, 집을 팔아도 빚을 전부 값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지금은, 집을 팔면 빚은 다 값을 수 있다. 이것만으로도 큰 위안이 된다.
벼랑 끝에 선 느낌이었을 때는, 아찔했다.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어 보여 막막했다. 집 이외에도 이런 상황이 많았다. 갑자기 회사를 나와야 하는 상황도 그랬다. 열 살도 되지 않은 아이가 셋이었다. 집을 마련하기 전이었는데, 더 막막했다. 집을 마련하는 건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지만, 아이 셋을 건사해야 하는 건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한 방에서 뒤엉켜 자는 아이와 아내를 보면서 마음이 참 힘들었다. 하지만 두 달이 채 지나지 않아, 새로운 직장을 얻게 되었고 이곳에서 잘 생활해나갔다. 근심은 곧 기쁨으로 변했다.
벼랑 끝에 섰다는 느낌이 드는가?
벼랑 끝에 섰을 때는 위기로 느껴지지만, 돌아보면 기회였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새끼 새 이야기도 있지 않은가? 날개가 없다고 생각한 새끼 새를 어미 새가 벼랑으로 데리고 간다. 그리고 밀어버린다. 새끼 새는 살고자 온몸으로 몸부림치면서, 자기한테 날개가 있음을 발견한다. 벼랑에서 떨어지지 않았으면, 발견하지 못했을 날개다. 우리도 모두 날개가 있다. 자기 안에도 있고 주변에도 있다. 내가 벼랑 끝에서 날고자 한다면, 내 안의 잠재된 능력이 발휘된다. 주변에서 도움도 준다. 새끼 새가 날 수 있었던 건, 날개가 있어서이기도 하지만, 바람의 영향도 없다고 볼 수 없다. 날고자 하지 않는 데 바람이 도움이 될까? 내가 시작해야 벼랑에서도 날아오를 수 있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