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제할 순 없지만, 느끼지 못하는 건 문제다.
타인의 아픔을 느끼는 마음
어린 시절을 돌이켜보면, 황당하고 어이없는 행동을 종종 했다.
갑자기 궁금증이 생기면, 바로 알고 싶은 마음에 그랬던 것 같다.
초등학교(그땐, 초등학교) 다닐 때, 겨울이 되면 교실 한가운데, 난로를 피웠다.
교실 건물 뒤편 창고 같은 곳으로 가면, 갈탄이라고 해서, 주먹만 한 석탄을 나눠줬다.
당번은 등교하자마자, 양동이를 들고 갈탄을 받아왔다.
가끔은 난로 위에, 쥐포나 쫄쫄이 같은, 불량식품을 사다가 구워 먹기도 했다.
맛있게 먹겠다고 오랫동안 굽다 타면, 작은 연기와 함께 냄새가 심하게 났다.
교실에 들어오신 선생님은, 미간을 찌푸리시고, 창문을 열게 하셨다.
창가에 있는 친구들은 벌벌 떨며, 범인(?)을 노려봤다.
선생님은 주동자를 불러, 태운 것을 입에 물고, 손을 들고 있게 하셨다.
초등학교 3학년인가 4학년, 주산학원에 다닐 때 일이다.
학원에서는 연탄으로 난로를 피웠다.
학교에서와 마찬가지로, 가끔 쥐포 같은 불량식품을 구워 먹었다.
장난꾸러기들은, 지우개를 난로 위에 대고 눌렀다.
고무 타는 냄새가 지독하게 났는데, 오목한 지우개가 반듯하게 됐다.
수업이 시작되기 전, 난로를 지켜보고 있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다.
‘뜨거움을 느끼지 않는다면, 난로에 손을 올려놓아도 버틸 수 있겠지?’
고통의 감각을 통제해보겠다는, 야심 찬 생각을 한 것이다.
손을 들고 살며시 난로 위에 손을 올려놓았다.
고통을 통제해보겠다는 생각은 한 방에 날아갔고, 올리자마자 소리를 지르며 손을 뗐다.
교실에 있던 친구들은 일제히 고개를 돌렸고, 필자는 고통을 느끼며 손을 흔들어댔다.
한 친구가 밖으로 나가 선생님을 데리고 왔다.
선생님은 놀란 얼굴로, 세숫대야에 물을 받아오셔서 손을 담그게 하셨다.
손은 화상을 입었고, 물집이 생긴 곳도 있었다.
고통이 좀 진정이 되자, 선생님이 왜 그랬냐고 물어보셨다.
실험해봤다고 이야기하면 이해를 못 하실 것 같아, 실수로 그랬다고 말씀드렸다.
고통이라는 감각은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손을 데고 나서 배우게 됐다.
타인에 대해 느끼는 고통도 마찬가지다.
사랑하는 사람일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사랑하는 사람이 고통을 받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더 힘들게 느껴지기도 한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통곡하는 모습 대부분이,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과 아픔 때문이다.
자신이 직접 당하는 아픔보다, 사랑하는 사람이 겪는 아픔을 더 고통스러워한다.
어떤 사람이 처한 상황이나 어려움을 보고 가슴이 아프다면, 사랑한다고 볼 수 있다.
상대방의 고통을 내 고통으로 가져오기 때문이다.
그것은 억지로 가져오라고 해도 할 수 없고, 가져오지 않으려고 해도 되지 않는다.
타인의 아픔 앞에서 고통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자신의 마음을 살펴야 한다.
사랑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아픔은 겪는 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니기 때문이다.
타인에 대한 분노는 쉽게 느끼면서, 아픔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은 서글픈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