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적 박탈감’
경제 발전이 가속화되기 시작할 때, 사회에서 가장 많이 회자한 표현이 아닐지 싶다. ‘상대적’이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비교가 쟁점이다. 지금까지 크게 느끼지 않은 박탈감을, 비교하면서 절실하게 느끼게 된다. 지금도 이 표현은 자주 언급된다. 사건 사고가 발생하면, 그 원인을 여기서 찾기도 한다. 한적한 마을에서 아무 걱정 없이 살던 사람이, 도시에 들어와도 이런 마음을 느낀다고 한다.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면서 욕심이 생긴다. 욕심은 생기는 데 가질 수 없다면 어떨까?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게 된다. 지금까지 없어도 잘 살았는데, 그렇게 된다. 도시에 살던 사람들이 한적한 곳으로 들어가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닐지 싶다. 보이지 않으면 비교하지 않으니 말이다.
자동차가 흔하지 않던 시절.
자동차 가진 사람을 그저 부러워만 했다. 자동차를 살 여력이 돼서 구매했는데, 어땠을까? 원하던 자동차를 얻었으니 기뻤을 거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정차한 도로에서 고가의 자동차가 옆에 선다. 자기 자동차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좋은 차다. 운전자를 보니 자기보다 나이도 어린 사람이다. 어떤 마음이 들까? ‘젊은 사람이 성공했구나!’라며 존경의 마음을 낼까? 그럴 수도 있지만, 대체로 이런 마음이 들 거다. ‘어린놈이 부모 잘 만나서 좋은 차 타고 다니네?’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는 거다.
비교가 독인 이유는, 비교 대상에 있다.
비교할 때 어떤 사람과 비교하는가? 자기보다 열악하거나 덜 가진 사람과 비교하는가? 아니다. 자기보다 여유롭거나 더 많이 가진 사람과 비교한다. 비교하는 것 자체로 이미, 마음에 어둠이 드리워진다. 딱 봐도 자기와 별 차이 없어 보이는 사람이나 오히려 더 낮은 느낌이 들면, 어둠의 깊이는 더 짚어진다. 비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굳이 밝은 점을 찾는다면, 자기 스스로 채찍질할 때는 도움이 된다. 선망의 대상을 보면서, 더 노력하고자 다짐하는 비교는 도움이 된다는 말이다. 그것 말고는 없다.
비교하는 진짜 이유는 뭘까?
가지지 못한 것만 바라보기 때문이다. 그 사람의 처지나 어려움, 그리고 드러나지 않은 노력은 보지 않는다. 먹음직스러운 열매만 본다. 그러니 상대적 박탈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속사정을 알고 나서야, 그동안 가졌던 불편한 마음이 녹아내리게 된다. 열매를 맺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혹은 속앓이했는지 알게 되면, 열매의 가치를 다시 바라보게 된다. 열매만 봤던 나 자신을 책망하게 된다. 열매만 보고 판단하지 않기로 다짐한다.
비교는 본성이다.
본성은 자기 의지로 조절하기 어렵다는 거다. 의식한 다음에는 조절되지만, 무의식 상태에서는 어렵다. 자기도 모르게 생각나기 때문이다. 그 생각을 밖으로 표출하지 않으면 다행이다. 무의식 상태에서 비교하는 자아가 나서면, 이렇게 태도를 바꿀 필요가 있다. 드러난 좋은 면이 아닌, 그것을 위해 무엇을 희생했을까를 보는 거다. 마음고생일 수도 있고 피나는 노력일 수도 있다. 편안한 시간을 포기했을 수도 있고, 본성을 억눌렀을 수도 있다. 대가를 치렀다는 것을 인정하는 거다. 대가를 인정하는 순간, 존중하게 된다. 열매를 얻는 그 사람을 존중하게 된다. “너라면 그렇게 할 수 있었겠어?”라는 질문에 대답하기 어렵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인정하면 된다.
인정하면 비교하는 마음이 사라진다. 녹아내린다. 잠시 드러났지만, 이내, 사라진다. 비교를 이기는 힘은, 인정이다. 일상에서 마음이 불편한 상황을 떠올려보면, 인정하지 않아서 그랬던 일이 더러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인정은 이해하는 마음이다. 내 기준이 아닌, 있는 그대로 이해하는 마음이다. ‘이유가 있겠지?’라면서 판단하지 않고 그냥 바라보는 마음이다. 이 마음이 크게 자리하고 있을 때, 비교는 설 곳을 잃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