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대하고 바로, 복학했다.
3월 초에 제대했으니, 가능했다. 마지막 휴가를 나와서 복학 신청을 했는지 아니면 제대하고 바로 절차를 밟았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제대 후 바로 복학한 기억은 확실하다. 경찰의 꿈은 완전히 접었다. 학업에 충실히 임해서 임용고시를 보기로 했다. 잠시 경유는 했지만, 꿈꿔왔던 체육 교사의 길을 가기로 한 거다. 복학하고 처음에는 좀 얼떨떨했다. 냉탕에서 온탕으로 넘어온 것처럼, 좋기도 하고 뭔가 어색하기도 했다. 신입 시절 바라봤던 복학생은 아저씨라는 느낌을 나도 주는 게 아닐지 걱정이 되기도 했다. 문화 충격도 있었다. 가장 큰 충격은 컴퓨터 사용이었다. 군대 가기 전에는, 리포트를 손글씨로 적어서 제출했었다. 물론 컴퓨터로 작성해서 제출하는 사람도 있었다. 두 가지 방법이 다 가능했다. 하지만 복학하고 나서는 손글씨는 불가했다. 무조건 컴퓨터로 작성해서 제출하라고 했다. 적응해야 했다. 기계하고는 거리 두기가 편했던 나는, ‘그냥 손으로써 써서 제출하지 뭐.’하며 타자 연습을 하지 않았다. 선택이 가능했다는 말이다. 선택이 가능하지 않은 현실과 마주하고서야, 컴퓨터 실에서 타자 연습을 시작했다. 여름 방학 때로 기억된다. 집에 컴퓨터가 없던 때여서 학교에 나와 연습했다. 한 땀 한 땀 바느질을 하듯, 각 손가락에 해당하는 자판을 찾아 고개를 위아래로 움직였다. 입력해야 할 타자를 하나씩 치기 시작했다. 오래지 않아 화면만 보고 작업할 수 있게 되었다. 변화에 적응하지 못해 고생한 첫 사례로 기억된다.
대학에 관한 추억이 많지는 않다.
입학하고 집중적으로 활동해야 동기들 그리고 선후배와의 돈독한 관계로 뭔 일이라도 있었을 텐데 말이다. 주일학교 교사 활동에 집중하느라 수업이나 공식적인 행사 외에는 거의 참석하지 않았다. 아쉬움은 있지만, 후회는 없다. 인생의 한 챕터에서 좋은 몫을 택했다고 자부하기 때문이다. 짤막하지만 학교에서의 추억도 떠오르는 몇 장면이 있다. 입학하고 나서였다. 대학 들어오기 전에 알던 대학 캠퍼스는 잔디밭이 넓게 펼쳐진 곳이었다. 그곳에서 낮잠 자는 모습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대학 들어가서 해야 할 1순위로 선정했다. 아니 그거 말고는 딱히 정한 것 없었다. 입학하고 나서,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잔디밭이 보이지 않았던 거다. 학교는 입구부터 건물까지 시멘트 바닥으로 된 언덕이었다. 건물 곳곳에는 잔디가 아닌 나무를 심어놓은 화단만 있을 뿐이었다. 어떻게든 잔디밭에서의 낮잠을 포기할 수 없었다. 아이디어를 냈다. 화단 중 풀이 좀 있는 곳에서 낮잠을 자기로 한 거다. 입학하고 같이 다닌 두 명의 친구에게 함께 하자고 제안했다. 그들은 어이없는 표정이었지만, 어떤 감언이설에 넘어갔는지 함께해주었다. 신문을 사서 바닥에 깔고 누웠다. 사람들이 오가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다. 마음으로 품었던 미션을 완성했던 거다. 경비 아저씨가 나오라고 할 때까지 그곳에 있었다. 두 친구가 아니었다면 해내지 못했을 거다. 친하게 지냈던 이 두 친구와 영화 모임도 만들었다. 말이 모임이지 그냥 영화 보자는 거였다. 두 번인가 하고는 해체됐지만 말이다. 영화를 너무 편향적으로 선정한다는 게 이유였다. 액션 영화 그것도 한국 영화를 좋아했던 내 성향으로 너무 몰고 갔었다. 친구들은 관심도 없는 영화를 봐야 했으니, 그랬을 만도 하다. 이때의 인연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것에 감사한다. 군대 간 시점이 조금 다르긴 했지만, 복학하고도 계속 연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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