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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리성 김작가 May 23. 2021

3. ‘간섭’이 아닌 ‘관심’으로 바라보기

생활

가족이 함께 식당에서 식사할 때였다.

첫째 아이를 바라봤는데, 왼손을 바닥에 대고 삐딱하게 앉아서 밥을 먹고 있었다. 그 모습이 보기 싫어서, “똑바로 앉아서 먹어야지.” 하고 한마디 했다. “네…” 약간 불평이 섞인 목소리로 대답하면서 자세를 고쳐 앉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다시 삐딱하게 앉아서 밥을 먹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다시 한번, “똑바로 앉아서 먹으라니까!” 하며 조금 전보다, 강하게 말했다. 아이는 뭔가 못마땅하다는 듯이 기운 없이 “네…” 하며 다시 자세를 바로잡았다. 평소에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는 아이였기에, 왜 그런지 밥 먹는 모습을 자세히 지켜보았다.


아이가 앉아 있는 상 위에는 반찬을 비롯한 물컵, 메뉴판, 냅킨 등이 가득히 놓여있었다.

그런 물건들로, 밥그릇은 아이의 왼편으로 쏠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제야 자세가 비딱했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필요 없는 물건들을 치우고, 밥그릇의 위치를 아이의 중앙으로 옮겨주었다. 아이는 반듯한 자세로 편하게 밥을 먹을 수 있었다.


재차 나무랐을 때, 딸아이는 서운한 마음이 들었으리라 생각된다.

‘지금 제 상황이 그럴 수밖에 없다고요!’라고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질문을 다르게 했으면 어땠을까 생각해봤다. “똑바로 앉아서 먹어야지?”가 아니라, “어디 불편하니?”라고 물어봤다면 어땠을까? 서운한 마음이 들지도 않고, 어렵지 않게 원인을 찾고 해결해 줄 수 있었다.     

 


‘간섭’의 눈은 지적하게 되지만, ‘관심’의 눈은 살펴보게 된다.

내가 전자의 질문을 했던 건, ‘간섭’의 눈으로 바라봤기 때문이었다. ‘관심’의 눈으로 바라봤다면 후자의 질문을 했다는 생각이 든다. 아이를 바라보는 시선에 따라,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이 달라진다. 그 말은 뉘앙스가 약간 달라지는 말이 아니다. 전혀 다른 뉘앙스의 말이 전달된다. 어쩌면 내가 느끼는 것 이상으로, 상대가 받아들이는 영향은 클 수도 있다. 때린 사람은 기억하지 못해도, 맞은 사람은 기억하는 것처럼 말이다. 아이의 처지에서는 더욱 그럴 수 있다.

      

간섭은 노력 없이도 할 수 있지만, 관심은 큰 노력이 필요하다.

겉으로 드러난 상황과 보이는 모습만 보고 판단했다면, 간섭이다. 상대방이 그렇게밖에 할 수 없는, 원인을 생각해 보진 않았다면 간섭이다. 겉으로 드러난 상황과 보이는 모습에 마음이 상하더라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다른 모습이 있는지 물어봐야 관심이다. 그렇게밖에 할 수 없는 원인이 있진 않은지, 생각해 보고 질문해야 관심이다.     


관심을 간섭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도 염두에 둬야 한다.

한 번은 카페에서 글을 쓰고 있는데, 본의 아니게 다른 사람들의 대화가 들려왔다. 소리가 컸기도 하고 내용에 관심도 가서,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엄마의 잔소리가 듣기 싫다고, 친구에게 하소연하는 젊은 여자의 목소리였다. 목소리에 짜증이 한껏 묻어있었다. 정말 싫다는 느낌이 고스란히 전달됐다.      


잔소리의 핵심은 이렇다.

당신이 살아온 대로 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하셨다고 한다. 자신이 알아서 잘하고 있는데, 왜 그렇게 맨날 잔소리하는지 모르겠단다. 목소리의 상태나 말투로 봐서는 그렇지 않을 것 같은데 말이다. 그녀의 엄마가 무슨 말을 했는지 알 수 없지만, 이렇게 짐작해볼 수 있다. 당신은 아프고 힘들게 살아오셨다. 자식은 그러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었지만, 지켜보니 당신의 전철을 밟고 있다는 생각이 드셨다. 그래서 ‘이렇게 하지 마라, 저렇게 해라’ 하면서 알려주셨다. 자식은 당신이 겪은 아픔과 힘듦을 겪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 하나다. 하지만, 듣는 당사자는 그것이 싫다고 하면서 투덜대는데, 그 이유가, 간섭하는 게 싫다는 것이다.    

 

왜 딸은 엄마의 우려를 잔소리로 듣고, 그것을 간섭한다고 생각했을까?

자신이 알아서 잘 생각하고 판단해서 하는 행동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신도 엄연한 성인인데, 아이 취급하는 것이 싫다. 엄마에게서 ‘존중의 욕구’가 발휘되었다고 볼 수 있다. 엄마는 자식이 아무리 성장해도 철부지 어린애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걱정되고 불안하다. 처음 두 발 자전거 탈 때를 지켜보는 것처럼, 항상 걱정과 불안의 두 모래주머니가 어깨에 얹혀있다. 그 마음이 잘 전달되지 않는 것이 안타깝다.      


부모의 관심이 자식에게 간섭으로 들리는 것은, 해결되지 않는 숙제로 보인다.

그래서 어른들이 “너랑  닮은  낳아서 키워라!”라고 악담 아닌 악담을 하셨나 보다. 자식일 때는 몰랐던 관심을, 자식을 키울  깨닫게 된다. 부모님과 함께  때를 돌이켜보면, 부모님이 하셨던 말을 관심으로 들었던 적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사실 지금도 그렇다. 아직도 이런저런 걱정을 잔소리로 듣고 있다. 그런데도 부모가 됐다는 이유로, 나의 자식은 관심으로 들어주길 바라는 것은 욕심이 아닐까?


하루에도 아이들을 위해서 하는 많은 말을 관심이라는 이유로 한다. 하지만 아이들은 관심으로 듣지 않고 간섭으로 듣는다. 그렇다고 서운해하지 말아야 한다. 부모가   있는 역할은 관심으로 말해주는 것이지, 자식의 귀와 마음에 담아주는  아니다.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 우리가 깨달은 것처럼, 깨닫게  날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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