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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리성 김작가 May 22. 2021

2. 뭣이 중헌디?

일찍 퇴근하는 날이 거의 없던 시절이 있었다.

한참 실무를 볼 때다. 야근하거나, 저녁 미팅이 잡혀있을 때가 많았다. 야근이나 저녁 약속으로 밥을 먹고 가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되도록 집에서 밥을 먹으려고 노력했다. 주말 출장도 많았기 때문에, 그렇게라도 집에 있어야겠다는 마음이, 약간의 의무감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그렇다고 아이들과 신나게 놀아주거나, 아내와 시간을 보내는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한 번은 퇴근하고, 저녁 9시쯤 집에 들어와 저녁을 먹었다.

저녁을 먹고 있는데, 둘째 딸이 말을 걸어왔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로 기억된다.

"아빠, 밥 다 드시고 나랑 놀아줘요~"

만성피로증후군으로 평소에도 피곤했지만, 그날은 유난히도 더 피곤했던 나는 밥을 먹고 일찍 자려고 마음먹고 있었다.

"오늘은 피곤하니까, 다음에 놀자~"

“칫!”

아이는, 아쉬운 마음과 불만의 표시로 한마디를 던졌다.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그래야 다음날 일 하는데, 지장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컸다.     


우리 아이들은, 보채지 않는다.

집에서나 밖에서 보채는 경우를 거의 보지 못했다. 마트에서 장을 볼 때, 갖고 싶은 장난감을 발견하고 사달라고 할 때도, “다음에 할까?”라는 말 한마디면, 그냥 자리에 갖다 놓았다. 가끔 조른 적은 있어도 생떼를 부린 적은 없었다. 가끔 장난감 가게 앞에서, 울며불며 소리 지르고 바닥을 뒹굴던 아이들을 보는데,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 정도는 아니지만, 의외로 생떼를 부리는 아이들이 많은 것을 보고, 참 다행이라 생각한 적이 있다. 큰 복을 입었다고 생각한다.      


밥을 먹고 있는데, 핸드폰에 알람이 떴다.

어플 업데이트를 하라는 안내였다. 그래서 업데이트 버튼을 눌렀다. 언제 와 있었는지, 아이가 내 뒤에서 서 있다 물었다.

"아빠, 뭐 하는 거예요?"

"응? 어, 어플 업데이트하는 거야?"

"업데이트는 왜 해요?"

"핸드폰에서 하라고 하니까…."

그때, 아이가 가슴에 비수를 꽂는 한마디를 힘없이 내뱉었다.

"칫! 내 말은 안 들어주면서 핸드폰 말은 잘 듣고…."     


등골이 오싹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라 생각했고, 물어보는 말에 대답한 것뿐이었다.

하지만 아이는 나의 말과 행동에 속상함을 느꼈다. 자기가 놀아달라고 한 이야기는 안 들어주면서, 핸드폰이 업데이트하라는 말은 잘 들어주는 아빠가 좋게 느껴지지는 않았을 거로 생각된다. 어쩌면 아빠의 모습을 보고 자신이 핸드폰보다 못한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심코 하는 말과 행동이, 아이들에게는 큰 의미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음과 동시에 정말 소중한 것을 놓치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해보게 되었다.      



소통전문가로 잘 알려진 김창옥 강사님의 <유쾌한 소통의 법칙 67>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한 코미디 쇼에서 주인공이 바나나 껍질을 벗기더니, 알맹이는 휙 던져버리고 껍질을 우걱우걱 씹어먹는 장면을 본 적이 있다고 했다. 강사님은 메시지가 너무 크게 다가왔다고 했다. 삶의 맛과 양분의 본질인 알맹이를 버리고, 수단에 불과한 껍질을 취하는 모습으로 바라봤다. 그러면서 이런 대화를 언급했다.


“얘야, 이번 주말에 집에 한번 들르면 안 되겠니?”

“바빠요.”

“여보, 오늘 우리 결혼기념일인데 일찍 들어올 거죠?”

“바빠.”


지금 손에 잔뜩 쥐고 있는 바나나 껍질을 버리고, 우리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사랑하는 가족, 무엇보다 소중한 건강,   진정한 알맹이를 담아야 한다고 결론짓는다. 없어도 되는 것들에 목숨을 걸고 있는지도 모른다면서 말이다.      


아이들의 요청을 쉽게 거부할 수 있는 이유는, 언제나 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오늘 아니면 내일 놀아줘도 되고, 아니면 모레 아니면 언젠가는 놀아주면 된다는 마음이 크다. 우선순위로 따지면 제일 하위권에 위치한다. 가까이 있기에 언제든, 내 의지에 따라 결정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아이가 아빠와 거리를 둘 수 있다.

아이가 손을 내밀었을 때 그 손을 잡아주지 않은 것이 아빠라면, 나중에는 아빠가 내민 손을 아이가 잡아주지 않을 수 있다. 그 시간이 오래 남은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그때는 돌이키려 해도 쉽게 돌이키기 어렵다.     


예전에 본 공익광고가 생각이 난다.

‘아빠가 중학생 정도 되는 딸의 방문을 연다. 대화를 시도하려고 하지만, 딸아이는 대꾸하지 않는다. 아빠는 실망하며,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방을 나간다.’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대화 부족에 대한 공익광고였다.

이 광고를 보면, 딸이 너무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노력하는 아빠의 마음을 받아주지 않기 때문이다. 이 장면을 딸의 처지에서 해석해 봤다. 지금까지 대화라고는 잘하지 않았던 아빠가, 어느 날 갑자기 대화하자고 한다. 중학생 정도 되는 딸은 지금 사춘기이거나, 감수성이 예민한 시기다. 딸아이는 그런 아빠에게 고마움을 느낄까? 낯선 모습에 당황할까? 후자의 느낌이 강하다고 본다. 아빠가 어릴 때부터 딸과 대화를 했다면, 딸이 커도 대화할 가능성은 크다. 나중에 후회해도 소용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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